문학전문지 <쓺>

문학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을 반연간 문학전문지

창간사


더듬거리며 다시 시작하기

[쓺-문학의 이름으로]를 창간하며

이 문학지의 창간을 구상하기 시작할 무렵, 외마디 외침처럼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홑 자로 그 제호를 짓고자 했던 우리의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것은 ‘쓰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인 ‘씀’이었다. 우리는 거의 존립의 위기에 처한 문학을 새롭게 살아 움직이게 할 글쓰기에 안간힘을 다 모으고 싶었으므로, 거의 필연적으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자 ‘쓰다’라는 단어의 다른 뜻들이 뒤따라오며 글쓰기의 중층적 의미를 암시적으로 일깨워줬다. 지금-여기 너머를 향한 문학적 글쓰기는 어쩌면 변신의 상징인 가면을 쓰는 짓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변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의미를 획득하느냐에 따라, 때로 명예로운 관을 머리에 쓰게 되기도 하고 때로 제 무덤을 쓰는 결과에 이르기도 한다. 그 결과는 마침내 쓰인 글의 씀씀이에 따라, 독자가 그 글을 읽고 무엇에 쓰느냐 즉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리라. 글의 씀씀이가 일찍 발견되든 뒤늦게 발견되든 상관없이, 형용사 ‘쓰다’가 고개를 쳐드는 것은 이 지점이다. 글쓰기 과정에서 어떤 맛이 배어 나온다면 그것은 쓴맛일 수밖에 없다. 쓰는 자는 홀로 쓰되, 쓰인 글은 독자 없이 저 홀로 자존할 수도 자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문학지의 제호가 ‘씀’에서 ‘쓺’—‘쓸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글쓰기에 대한 우리의 일반론적 상념이 거기까지 흘러온 뒤, 거의 동음이의어인 두 단어가 문득 한 단어처럼 겹쳐져 나타난 데 있었다. ‘씀’이 아니라 ‘쓺’이 맞는 표기법인가 했던, 모종의 집단무의식적 착각이 우리 사유에 또 다른 물꼬를 텄던 것이다. 우리는 몽상을 쫓아갔다. 문법적으로는 ‘씀’이 맞지만, 문학적으로는 ‘쓺’이 ‘씀’의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토록 쓴맛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글쓰기를 계속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글쓰기에 전제된 독자 즉 타자들을 통해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이 세상을 언어의 빗자루로 쓸기 위해서가 아닐까? ‘쓸다’라는 동사가 공히 허락하는 양방향의 행동은, 쓸어-버리는 것과 쓸어-모으는(담는) 것이다. 한마디로, 글쓰기는 내 안에 깃든 내 밖의 세상에서 어떤 것들은 쓸어내 버리고 어떤 것들은 쓸어 모아, 내가 구성하고 싶은 다른 세상을 그려 내려는 욕망의 소산이 아닐까? 그것이 아무리 자폐적인 독백체의 글쓰기라 하더라도 그렇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런 감추어진 욕망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근원적인 비밀의 하나일지 모른다. 그런데 혹시, 지금은 그 욕망을 의지로 바꾸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지금 이 시점에서 새 문학지를 창간한다는 것은, 그것도 문학의 위기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그러겠다는 것은, 아무리 소극적 태도를 취하더라도, 일정한 의지의 표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학에서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과잉 의지는 자칫 의식을 경직화시키고 상상력을 도식의 틀로 가두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고, 그래서 우리 의지를 단순히 ‘쓺’이라는 한 글자로 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쓸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선험적 이념 집단이 아니라 각각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글쓰기 주체들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자리가 그들의 자발적 참여의 장場으로 활성화되기를, 그럼으로써 지금 우리가 ‘우리’라고 부르고 있는 지극히 작은 공동체가 점차 문학의 새로운 실존이 가능한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 그 공간을 하나의 문학적 자장磁場으로 유지시켜줄 최소한의 자력磁力, 곧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그 대답의 열쇠는 아마도 ‘쓸다’라는 타동사의 목적어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무엇을 쓸어내 버리고 무엇을 쓸어 모으려 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시대의 문학 기제를 거의 기능 정지시키다시피 녹슬게 하는 패배적 순응주의와 이를 합리화하려 드는 허위의식을 걷어내고, 그것을 다시 작동시키게 할 윤활유로서의 저항적 실험정신과 이를 밑받침하는 부정의 의식을 채우자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의지의 정체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문학을 위해 감당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의 채택이자 사명감의 토로이기도 하다. 물론 이 명제적 진술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보다 설득력 있는 구체적 소명을 제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기서 지시하는 순응주의가 과연 무엇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인지에 관한 소명을.

그에 관한 성찰의 원점으로 돌아가 볼 때, 우리의 첫 의지는 자못 역설적이었다. 우리가 품었던 최초의 순진한 의지는 매우 현실적인 전의戰意였던바, 우리는 우리가 맞서 싸우려 했던 상대를 자신들의 이기적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문학을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그 존재의 토양마저 황폐화시키는 상업주의적-정치적 이익집단 혹은 그 세력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대로였다면 그것은 문학적인 싸움이 아니라 사회적인 싸움이 되기에 십상이었던 셈이다. 그때 눈에 보이던 그 집단이나 세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거대한 권력에의 의지, 온 세계를 휘덮기 시작한 어떤 이데올로기적 에너지에 의해 태어난, 무너뜨려도 어디선가 또 돋아날 작은 사회적 생체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철하고 치열한 의식이나 자유롭고 심오한 상상력의 발현이 애당초 불가능해진 듯한, 아니면 어디선가 발현되더라도 그 소통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문학—더 나아가 문화 전체—의 치명적 상황이 실제로는 그 거대한 힘에 의해 은밀히 조성되고 강화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치 문학다운 문학, 문화다운 문화를 박멸하는 데 박차를 가하는 듯이 보이는 그 힘은 그 사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며, 어느덧 지구 전체를 운영하는 현실적 권력을 장악하고 그 지배 체제를 거의 완성해가고 있다. 이제는 누구나 인지하게 되었듯이, 일상에서부터 꿈까지 우리의 삶 전체를 자기 의지대로 조직해가고 있는 이 무지막지한 세계 체제는 크게 디지털 문명, 세계화 시대, 정보화 사회,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주제어들로 요약된다. 대략 30여 년 전부터 이 체제는 예고되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그때의 디지털 문명, 세계화 시대, 정보화 사회라는 명제는 한편으로 인간적 삶의 질을 제고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의 표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신자유주의의 개입은 그런 가능성을 와해시킨다. 역시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정치 질서와도 연관된—의 핵심임을 확실하게 과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목표가 전 세계를 단일 시장화하고 어떤 인간적 활동의 산물들이라도 소비용 상품화를 꾀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이 문화를, 문학을 어떻게 다루는지 확인해보라.

현대사회에서는 당연히 문화적 산물도 일종의 상품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문화 상품은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균형을 맞추기가 매우 어려워, 예측 가능한 이윤을 창출하기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문화 상품은 스스로 상품이기를 거부하는 모순적 태도를 거침없이 노출하면서 그 모순이 이 사회 자체의 모순임을 시위하려 들기도 했다. 문화를 움직인 주도적 동력은 인간적 삶의 본질에 관한 문제의식이었지 사물의 실용적 효율성에 관한 문제의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라는 것이 사회적 구조 안에 내포된 일종의 자성自省 장치였다는 것을, 반면에 경제 논리로는 다루기 거추장스러운 애물단지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그동안의 자본주의가 그 예외적 지위를 용인한 것은 근대의 핵심 이념인 인간중심주의라는 명분 덕분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탈-근대가 외쳐지면서부터, 동시에 탈-인간중심주의가 고개를 쳐들면서부터, 다시 말해 지금의 세계 체제가 태동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세계를 경제적으로 단일화시키려는 신자유주의는 문화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그 사회적 기능을 오락으로 한정시키고, 문화 활동 자체가 오락 상품의 생산 작업이 되는 체제로의 전환을 노골적으로 도모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세계화된 문화산업의 시대, 전대미문의 대중문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패배적 순응주의와 허위의 식은 그러니까 이 새로운 세계 체제와 문화적 조류에의 무력한 굴복과 그에 대한 자기 기만적 변명을 뜻한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후반부터, 문학 역시 저 거대한 문화산업의 쓰나미, 지진해일에 휩쓸렸었다. 거기 휩쓸리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가? 그토록 오래 간직해온 문학적 자의식과 자존심은 단숨에 어디로 휩쓸려 사라졌는가? 상품가치가 현저히 떨어지는 시가 일찌감치 뒷전으로 밀려나고 이른바 본격소설들도 유통과정에서 서서히 소외된 다음, 얼마 동안 문학판을 뒤덮은 것은 재빨리 새 시대의 시장논리에 편승한 각종 대중소설이었다. 그런데 그 소설들은 또 어디로 증발해버렸는가? 애당초 소비상품으로 제작되었으니 다 소비되고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것인가? 황량해진 문학판엔 그간에 내뱉어진, 쓰레기가 된 언어들만이 나뒹굴고 있다. 사태의 본질을 오도하는, 뜬금없는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말들. 문학은 원래 오락이었고 대중을 사로잡는 게 진짜 문학이라는 시대착오적 억지부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 혼성모방이야말로 문학에 가깝다는 현학적 위선까지.

지금, 기사회생을 기다리고 있는 문학은 더 잃을 것조차 없어 보인다. 아니, 그런데도 아직 최후의 굴복이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세계 체제의 첨병인 디지털 매체의 부속물 또는 장식물이 되어 달라는 유혹에 순응하는 것. 문학이 디지털 매체에 편입된다는 것은, 문학이 종이책에서 모니터로 옮겨간다는 단순한 뜻과는 심히 다르다. 그것은 텍스트가 분해되거나 재조립되고 다른 텍스트와 혼합되어 정처없이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원본’의 고유성과 자기 결정성이 무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문학의 존재 이유와 존재 방식이 변경되는 결과로, 마침내는 문학의 정체성이 바뀌거나 폐기되고 ‘문학적인 것’만 과거형으로 남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원론적으로만 따지자면, 문화 양식은 역사와 함께 변모를 거듭해 왔으므로, 문학 또한 그런 과정을 거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먼저 숙고해야 할 문제는, 문학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살아남아 자신만의 또 다른 미래를 추구해나갈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다. 이는 즉각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다양하고 심도 있는 실험의 과정을 요청하는 의문에 가깝다.

우리가 내세우는 저항적 실험정신과 부정의식도 위와 같은 관찰 및 성찰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제시했듯이, 부정의 의식은 먼저 디지털 문명과 함께 구축된 새로운 세계 체제를 겨냥하고 있다. 그렇지만 흡사 대기권처럼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이 거대한 체제와 직접 맞싸우겠다는 것은 허공에 주먹을 날리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더구나 이미 그 체제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가 취할 방법은 체제 안의 어떤 빈틈을 찾는 것이 고작이지 않을까?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하겠다고? 거기서, 솔직하게 한계를 인정하면서, 우리가 시도하려는 실험은 양면적이다. 앞면에서, 우리는 그 빈틈을 시장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작은 문학 공동체의 독립 공간으로 조성할 수 있는가를 실험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공동체 활동은 현 체제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반성의 장치로 발전할 수 있거니와, 또 다른 소공동체들의 성립과 그들과의 연대라는 희망을 불러올 수 있지 않겠는가. 동시에 그 뒷면에서, 우리는 문학이 문학으로 존립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실험할 것이다. 이는, ‘문학은 다시금 무엇일 수 있으며 새로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자문을 통한 문학의 자기반성 행위로서, 적어도 어떤 미지의 언어들이 구체적으로 산출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실험은 무수한 실패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어떤 실패도, 완전한실패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실험정신이다. 실험정신은 도전 그 자체이며, 도전은 끝없는 다시 시작하는 암중모색이다. 암중모색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를 열기 위해 어둠을 더듬어나가는 것. 문학적 실험은 그런 의미에서 한 치 앞도 헤아려지지 않는 미지의 언어 세계를 더듬더듬 더듬어나가는 말의 몸부림이나 다름없다. 그 말부림이 꿈틀대며 남기는 행적을 끌고 나가다가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밝아오는 새벽을 맞고자 하는 역설적 꿈의 실천!

우리는 이 문학적 실험 공간으로 첫발을 내딛기 직전, 너무 외로워 보이는 ‘쓺’이란 외마디 제호 뒤에 작은 글자로 ‘문학의 이름으로’라고 덧붙였다. 언젠가 이 행로에 동참해줄 이들에게 우리의 속뜻을 타전하는 모스 부호처럼. 오래된, 어쩌면 낡은, 그러나 역동적으로 역사를 가로질러 온 문학의 이름을 걸고, 끝내 그 이름으로 이 세계를 살아내기 위하여…

문학실험실을 대표하여, 이인성


편집위원회

  • 발행인 겸 편집인: 이인성(소설가)
  • 편집위원: 김태환(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조강석(문학평론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김대산(문학평론가), 윤경희(문학평론가)
  • 편집주간: 최하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