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문학패

제정 목적과 시행 원칙

한국문학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이루어낸 비평가 고(故) 김현의 25주기(2015년 6월 27일)를 맞아, 문학실험실은 그를 되새기고 기리며, 그의 이름으로 한국문학의 진정한 질적 진화를 위해 ‘뜨거운 상징’(김현의 표현)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문학상을 제정 · 시행키로 결정하였다.

‘김현 문학패(文學牌)’는 문학상으로서의 분명한 개성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는 이 상을 통해 한국 문학의 한 조류가 형성될 수 있도록 그 문학적 특성의 일관성을 최대한 유지해나갈 것이다(‘패’에는 패거리라는 뜻도 담겨 있다).

우선, 이 문학패는 김현의 미래지향적 문학관에 근거를 두고 그가 일관되게 옹호한, 한국 문학에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실험 정신을 기본적인 선정 지침으로 삼는다.

그리고, 일정한 선정 조건 아래(아래 참조), 한 해 동안 추수된 단일 작품이나 저서를 대상으로 한 ‘작품상’이 아니라, 한 작가의 전 작품을 평가하여 수여하는 ‘작가상’의 성격을 띤다.

시행 규정

본 ‘김현 문학패’는 위의 목적에 따라 매년 시인 ‧ 소설가 각 1명씩을 선정하여 기념 문학패와 창작지원금(시 1,000만원, 소설 1,500만원)을 수여한다.

단, 그 수여 대상자는, (1) 선정연도를 기준으로 만 48세(김현의 타계 나이) 이하이며, (2) 등단 후 5년 이상 활동하면서 해당 장르의 저서를 2권 이상 출간하였고, (3) 그중 가장 최근의 저서를 선정연도 전해 말일을 기준으로 3년 이내에 출간한 시인 ‧ 소설가로 한정한다.

선정위원회는 위원들을 장르별로 분리하지 않고 합동 토의 방식으로 진행하며, 수여 후보 자격이 3년간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후보자 명단이나 토의 내용은 공개하지 않고 최종 선정자와 선정 이유만을 발표한다.

시행 절차

매년 1월, 위 조건에 부합하는 시인 ‧ 소설가의 명단과 출간 저서 목록을 작성하여 일정수의 추천위원들에게 복수의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고, 선정위원회가 이를 참조하여 최종 후보자들을 압축한다. 2월부터 6월까지 선정위원회는 후보자들의 전 작품들에 대한 검토를 진행한 뒤, 6월 말 김현 기일에 즈음하여 최종 수여자를 결정 발표한다. 그리고 시상식은 9월말에 시행한다.


제2회 수여자 선정

소설 부문 : 김태용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숭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5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하여,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2007), 『포주 이야기』(2012)와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2010), 『벌거숭이들』(2014)과 가명의 실험적 텍스트 『뿔바지』, 『자연사』 등을 펴냈고, 2008년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수상소감-김태용

소설 시 부문 : 이제니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나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페루」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2010)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2014)를 펴냈고 2011년 편운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등단 이후 시와 노래가 어우러진 낭독 공연 <더블 플레이 포엠>을 진행해오고 있다..

수상소감-이제니

선정의 말

김태용 : 궁핍한 시대의 소설가의 삶-위선을 두 번 뒤집는 위악성에서부터 모독의 거친 숨결로

김태용이 21세기 한국문학을 열어나가는 작가 중 가장 별종이라는 데에 이견을 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존재의 사소함과 일상의 지리함에 대한 분노로부터 유희에까지 이르는 다채로운 공깃돌들의 세계에서 김태용은 오히려 저 1960년대의 위악성을 끄집어내 그것이 품고 있던 도발적 정신을 되살려낸다. 등단작인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2005)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의 도발성은 현실로부터 두 번 건너뛴 자리에 위치한다. 한 번은 세상 사람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조롱하는 것이며 다른 한 번은 그 조롱 자체를 능멸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 1960년대의 위악성이 거짓 초자아에 대한 저항과 자기 세계에 대한 열망에서 태어난 것이라면 21세기 문명사회인 ‘대한민국’은 위선과 위선에 대한 조롱이 하나가 되어버린 세계, 다시 말해 초자아가 초자아의 권위를 잃었는 데도 여전히 초자아의 위상을 유지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여서, 위선에 대한 조롱이 위선을 이용하여 스스로 선을 가장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위선에 대한 조롱은 곧바로 선에 대한 투항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실로 등단작이 보여준 괴팍한 세계의 말끔한 종결은 위선에 대한 조롱이 그 조롱에 자발적으로 포박되어 선의 우주에 백기 투항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있다.
왜 선에 대한 투항이 문제인가? 왜냐하면 삶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들을 체험하기도 전에 ‘바른 생활’이라고 사전에 규정된 것에 의해 우리의 경험을 여지없이 축소함으로써 이 미리 규정된 세계 밖으로 나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항용 위선을 선의 가식, 선에 대한 배반으로 이해하기 일쑤이지만 실은 그것은 선의 사생아에 불과하다. 선이 없으면 악도 위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잠정적으로 ‘최선’의 상태를 가정하고 도모해야 하기 때문에, 선신은 몰라도 악마를 분별하는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위 ‘이슬람 국가’를 ‘다에시Daesh’로 불러야 하고, ‘미스 히틀러’의 입 상자들이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까닭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우리의 생각 밖으로 내몰아 버린다면, 우리는 저것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복잡한 곡절을 이해할 수 없어서 저것 이 재출현할 기회를 여전히 허용할 뿐 아니라, 우리가 몰아낸 것들 외의 모든 삶을 ‘선’으로 단일화하여 그 안에 숨어 있는 온갖 알력과 갈등 들을, 그것들의 효과를, 간단히 예를 들어, 샤를리Charlie의 효과와 “나는 샤를리다”의 효과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악은 언제나 선의 의장을 두르고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세상의 왜곡으로부터 발생하고 만다는 이른바 ‘악의 진부성’을 몰각함으로써, 그것이 선의 세상 그 자체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두테르테의 등장도 방치하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왜곡이 없이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왜곡의 방식과 각도 와 강도가 여하히 되어야 세상의 자유도가 감소에서 증가로 바뀔 수 있 는지를 질문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김태용의 첫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2007)는 그렇게 위선에 대한 조롱이 선으로 무화되는 과정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위선과 그에 대한 조롱을 생사를 건 필사적인 투쟁으로 극단화하여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세상사의 미묘한 운행을 감지케 한다. 위선의 조롱에 대한 능멸을 세계 안으로의 투항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의 세계의 자살로 둔갑시켜, 그 모든 행위들이 가장 위선스러운 행위조차 선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으로 느끼게 한다.

오빠의 책에는 오빠가 자살했다,라는 문장으로 가득했다. 마치 오빠 가 자살했다,라는 모양의 지네가 기어 다니는 듯했다. […] 오빠는 피를 책에 떨어뜨렸다. 피에 젖은 활자들이 스스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빠가 잠든 사이 활자들은 서로의 몸을 걸고 책에서 나 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다음 날이면 활자들이 조금씩 여백으로 밀려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_「유리방」

이것이 언어의 효과이다. 숨김없이, 남김없이 (2010)에서 장편으로 집약될 이 김태용식의 언어는 위악을 자기를 즐기는 조롱으로부터 필사적인 자학으로 구출해내려 하며, 그것을 통해 자살을 필사적인 타 생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언어가 하는 것은 거기까지다. 그다음은 독자의 몫이다.
두 번째 소설집, 『포주 이야기』(2012)는 이 필사적인 활자들의 몸부림 이 하나의 존재로 구현되었을 때 어떤 치욕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끔찍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 다시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언어는 “어둠과 패악으로 물들어 있는 지난 시절”을 가중적으로 되풀이시켜 체험케 하는 “한 시간 느린 시계”이다. 결코 죽음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드는 죽음을 향한 몸부림의 증언이다. 그러나 그 몸부림이 없다면 어떤 다른 삶이 가능하겠는가? 생이 치욕이라면 그 생을 끝까지 치러내 는 수밖에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홀러가는 물살에 몸을 맡기는 동시 에 물을 뚫고 가는 것뿐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_「물의 무덤」

그 느낌은 오로지 언어로서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체감을 통해 수용하는 것은 그것을 읽는 독자이다. 장편 『벌거숭이들』(2014)은 치욕을 언어로 바꾸어 수용하는 일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첫 페이지부터.

눈이 내리고 있으니. 눈이 내리고 있다니. 어떻게 눈이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이, 눈을 흉내 내며 눈을 모독하는 가짜 에 불과하더라도. 만져보고 싶다. 손이 녹아 사라져도. 입에 담아 천 천히 녹이고 싶다. 혀끝을 녹이는 차가운 빛이라고 해도. 눈을 맞으 며 뒹굴고 싶다. 벌거벗은 몸으로.

“손쓸 수 없는 몸으로, 손쓸 수 없는 의자를 고치는 것.” 그것이 모독의 감옥에 갇힌 인간이 해야 할 (거의 유일한) 할 일이다. 김태용은 다시 한 번 21세기 문명사회 한국인의 삶을 모독의 물로 씻어내면서 이 모독의 물세례가 결국은 쓰는 자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을 읽는 자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발가벗겨진 사실이 다리를 오므린 채 자신을 능욕할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로지 사실을 위반하며 사실을 재조립하는 순간만이 간헐적으로 숨을 내뱉고 있는 그를 증명할 뿐이었”으니, “미로처럼 열린 문장과 문장 사이를 거슬러 가자. 발목이 삐고, 무릎이 까지도록 넘어지면서 가자. 거기 그렇게 여자는 그를 기다리며 정지한 채 여전히 머물러 있다. 굳어가는 문장처럼. 석고의 문장. 석고가 마르기 전 문장을 더 붙이고 깎아야 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면서.
성적 욕망-무기력, 글쓰기 욕망-지둔, 몸의 욕망-갇힘이라는 삼 중고로 겹쳐진 『벌거숭이들』의 세계는 결국 이 치욕 그 자체를 황홀한 생의 열락으로 치환한다. “낡고 더러운 갈색구두” 속에 갇힌 “발바닥의 감각을 느끼며, 황홀해하며 걷는다. 황홀이 고통을 낳고 고통이 황홀을 낳을 때까지.” 이 욕망으로 전화한 치욕들이 내뿜는 이 기이한 썩은 냄새, 혹은 유두의 점액질의 분비물, 그리고 “맹목적이고 독보적인 노란 구름으로 가득 찬 세계”가 내비치는 “황혼의 빛”을 느껴 읽을 수 있는 자가 독자일 것이다.
김현은 어느 날의 일기에서 이제하의 『소녀 유자』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숨쉴 땅을… 뚫을 구멍을… 발붙일 장소를… 그런 나라를 찾아내지 못할 줄 아느냐.” 인용하면서 “궁핍한 시대의 방황하는 예술가들”이라고 그는 부연하고 있다. 지금은 온 세상이 모든 부면에서 궁핍 한 시대가 아닐까. 풍요가 넘칠수록, 모두가 자기주장들을 개처럼 짖어 댈수록. 모든 것이 이득 쪽으로 또는 충족 쪽으로 환원되는 한, 모든 풍요는 예술가에게는 오로지 궁핍의 적나라한 위협일 뿐이다. 그 궁핍을 견딜 김태용에게 축복을!

이제니 : 미구의 고향을 간척하는 시- 언어의 현상학적 환원으로부터 목격—발견의 상호순환으로

이제니는 「페루」(2008)로 시인됨을 알렸고 첫 시집의 제목을 『아마도 아프리카』(2010)라 붙였다. 낯선 이국이 이제니 시의 최초의 선택일 것이다. 왜 페루이고 아프리카인가? 시는 말한다. “고향이 생각 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세 가지 의미로 동시에 읽히는 이 구절을 통해 시인은 페루가 넌지시 가리키는 그의 고향이 미구(未久 혹은 未口)에 도래할 전혀 새로운 고장임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현재의 지도상에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거기는 너 무나 명백히 존재한다. 따라서 거기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고향의 존재적 명백함과 장소의 암흑성은 상호 순환하면서, 그를 방황케 하고, 그 방황을 적극적 방황으로 만든다. 가고 싶으나 갈 수 없어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근본적인 시적 태도를 이룬다. 그 시적 태도를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선은 목표도 기원도 잃어버린 방황 그 자체의 언어적 실존이 남는다. 언어의 고향이 궁극의 의미라면 의미를 잃어버린 언어에 일종의 현상학적 환원이 일어나, 언어의 언어로써만의 순수한 자생적 생존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기본적인 생장 형식이 복제와 변이이듯이 이 환원된 언어들도 되풀이와 변이를 통해 존재의 지속성을, 다시 말해 생의 리듬을 획득한다

알갱이 알갱이 당신이 알갱이를 볼 수 있는 건
알갱이를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어쩌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조금은 그리운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_「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아마도 아프리카』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린이 그린 그림
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런 기린

_「기린이 그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2014)

“어째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갱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걸까”라는 시구를 통해 우리는 이 ‘알갱이’가 ‘페루’며 ‘아프리카’의 치 환물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치환이되 그러나 여기에서 ‘알갱이’는 두 번 되풀이되는 순간부터 물건에서 언어로 존재하기 시작하고 이 언어의 소리 놀이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사물에 대한 그리움을 대체 한다.
우리는 이제니의 시 도처에서 이런 시구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시구들은 본래 의미 상실의 결락으로부터 태어났으나 그 효과는 거꾸로 의미에 대한 집착을 제어하고 언어 그 자신의 자율적 존재성을 느끼게 함으로써 순수한 실존적 감각 속으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
물론 이러한 언어의 자율적 존재성은 그만의 것은 아니다. 신연주의 「치르치르 미치르」(1985) 이래 여러 시인들이 정확히 그 효과를 의식하지 않은 채로 즐겨 사용한 기법이다. 특히 특정 지역의 시인들이 애호한 기법이기도 하다. 이제니의 독자성은 이러한 언어적 생명을 즐거운 도취 쪽으로 끌고 가지 않고 이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데서 나타난다. 첫 시집에서 그것은 “마침표를 잃어버린 슬픔, 양팔을 껴야만 하는 외로움. 그건 단지 요롱요롱한 세상의 요롱요롱한 틈새를 발견 한요롱요롱한 손가락의 요롱요롱한 피로”(「요롱이는 말한다」)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언어의 자가 생존은 외로운 방황이라는 숙명을 수락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밤의 공벌레」)에 표현된 것처럼 시간의 바늘을 부러뜨린 시인은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라는 믿음 속에 갇힌다. 이 숙명은 한편으로는 “흩어진 별무리들처럼 잠이 쏟아졌다”(「네 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인사」)에서처럼 그 믿음이 현상할 온갖 별무리들의 은하 속으로 침잠할 기대를 품게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회오에 시인을 사로잡히게 한다.

나는 수줍어서 얼굴을 붉힌 게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반복된다 반복된다 앵무의 목소리
율격없이 절연되어
율격없이 절연된 채로
그 오랜 세월 나를 다그쳤던 건 무엇이었을까

_「곤충 소년이 전진한다」

물론 시는 두 극 사이를 ‘하염없이’ 진동한다. 그 두 극 사이를 시 인은 “고아의 해변”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말이 다시 죽어가는 바다
밀려갔다 밀려오는
다시 태어나는 말이 달립니다
빛나고 아름답게, 빛나고 아름답고 쓸쓸하게
[…]
당신은 넘실대고
고아의 말과 한 몸으로 넘실대고
바다는, 고아의 해변은, 매순간 다른 리듬으로 밀려갔다 밀려오고

_「고아의 말」

그러나 두 번째 시집에 오면, “묻는 대신 대답하는 오늘의 나”(「기린이 그린」)를 만난다. 첫 시집에서 모든 언어는 가능성의 장소였다. 그것이 언어로부터 의미를 삭제함으로써, 다시 말해 모든 현실태를 정지시킴으로써, 언어가 미답지로서 확보한 터전이었다. 그 정지 덕분에 미 구의 고향을 향한 지평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지평은 열렸으나 길은 열 리지 않았다. 그것이 시인을 슬픔과 고독과 피로 속에 잠기게 하였다. 그 의 두 번째 시집에는 길의 가닥들을 짚는 기척들로 부산하다. 그 기척들 은 가령, “잿빛에서 잿빛까지/ 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으로” (「나선 의 감각 – 잿빛에서 잿빛까지」)와 같은 애잔한 이미지에서 보이듯, 그 방 황 자체를 운동으로 바꾸고자 하는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태어난다. 그리고 그 필연성은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본다라고 하자 희고 마른 뼈의 적막을 듣는다고 하자 심해의 어원을 찾아 깊이 깊이 떠돈다고 하자 물결의 적막을 적막의 불길이라고 부른다고 하자”(「나선의 감각 – 물의 호흡을 향해」)는, 무의미의 검은 강에 의미의 돌을 놓고자 하는 의지의 실행으로 우선 나타나는데, 그것이 무의미로부터의 발생인 한, 그 동작이 용이할 리가 없다. 그것은 “나아가는 동시에 멈추는 나뭇가지”와 같아서 “무엇과 왜와 어떻게라는 말 대신 그저 그렇게 되었다라고 하자 그저 그렇게 지금 여기에 놓여 있다라고 하자 다만 호흡하고 있다라고 하자 다만 있다라고 하자”에서처럼 의미를 펼쳤다가 도로 접으면서 다시 펼치는 동작을 되풀이한다(이러한 동작은 아주 독특하지만 이제니만의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아주 이질적인 양상을 통해 비슷한 동작이 출현하는 걸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무의미와 의미의 배접이 나아감과 멈춤이 라는 동작의 이중성으로부터 아주 다른 두 개의 존재태를 현상해냄으로써 썩 변별적인 형상들과 매우 활발한 의미 생성의 운동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방황하는 존재가 스스로를 분해하여 목격하는 자와 실행하는 자로 나누었고, 목격자와 행위자를 순환시켜 서로 상대방을 향해 진화해가도록 만들어서, 봄을 늘 새로운 발견이게 하고 행위를 늘 최초의 도전이게끔 하는 것이다.

그 꿈에서 나는 작고 검은 것이었다. 희고 소리 나는 것이었다. 작고 검은 소읍. 혹은 희고 둥근 침묵. 꿈속에서의 내 얼굴은 분명하지 않았다. 꿈밖에서와 마찬가지로. 너는 자꾸만 돌아오고 있었다. 너는 내게로 자꾸만 돌아오고 있었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너를 피부처럼 느끼고 있었다. _「나선의 감각–역양」

이렇게 시작된 나/너의 상호성은 다음과 같이 발전한다.

너는 거리의 저 끝에서 눈물처럼 번지듯 은빛으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고. 나는 작고 검은 글씨처럼. 혹은 희고 둥근 음표처럼. 한 줄에서 또 다른 한 줄로.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_「나선의 감각–역양」

이것이야말로 이제니가 마침내 다다른, 언어‘들’로 분할된 언어의 자발적 신진대사라고 할 만한 것이다.
김현은 「산문시 소고」에서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의 서문의 일부를 요약하면서 그 시의 의도를 이렇게 전한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는 동시에 머리와 꼬리를 이룬다. 번갈아도 그렇고 거꾸로도 그렇다. 우리들은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나는 내 몽상을, 당신은 수 고手稿를, 독자는 읽기를 그칠 수가 있다. 가운데 뼈를 들어보라. 그러면 두 조각의 고통스러운 환상이 어렵지 않게 합치할 것이다.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자르라, 그러면 하나하나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 또한, 이제니의 언어 한 토막을 들어 올리거나 여러 조각으로 잘라보시기를!


제1회 수여자 선정

시 부분 : 성기완

시인이자 뮤지션.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세계의문학』을 통해 등단하였고,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 『유리 이야기』, 『당신의 텍스트』, 『ㄹ』과, 산문집 『장밋빛도살장 풍경』, 『모듈』 등을 출간하였다. 록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 멤버로 활동하고 있으며,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사운드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성기완-수상소감
  

소설 부분 : 한유주

소설가.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하였고, 소설집 『달로』, 『얼음의 책』,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와 장편소설 『불가능한 동화』를 출간하였다. 2009년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인 독립 출판 활동으로 ‘울리포프레스’를 혼자 운영하고 있다.

한유주-수상소감
  

선정의 말

성기완 / 의미가 붕괴된 시대의 시적인 삶,
‘소음-시’와 ‘소리-시’의 탄생

성기완은 어쩌면 그동안 시인으로서보다는 인디-록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서, 작사가·작곡가로서, 그리 고 문화와 대중음악 비평가로서 더 이름이 알려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시적 성취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희석되었고 그 가치 또한 저평가되어왔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가 펴낸 네 권의 시집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시의 현란한 전개 과정 중에 딱히 그 표층으로 떠올려져 집중적 조명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시들은 당대의 표층을 움직인 일종의 심층 에너지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와 역할을 지녀왔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여기서 우리가 ‘의미’를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아이러니다. 1994년에 등단한 그는 문학적 시발점에서부터 ‘의미’의 세계를 정면으로 부정해온 시적 무정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 시발은 필경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며 전 시대의 이념들이 붕괴되어간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많은 시인이 어느새 의미의 폐허 위에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거나 기존의 의미를 재구성하려 했다면, 성기완은 ‘의미’의 허상들을 끝내 거부하고 더욱 외곬으로 존재의 근원적인 무의미성을 향해 다가감으로써, 역설적으로 무의미 자체의 꽃을 피우며—한국문학사 속에 무의미의 시학을 펼친 시인들이 있었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한국시의 전혀 새로운 전망 하나를 열었다는 점이 우리의 각별한 이목을 끌었다.

성기완의 첫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1998)는 그 시적 시발의 상황과 그가 가야만 했던 어떤 미래를 치명적인 숙명처럼 제시한다. 그 가 이 세계를 마주보며 발설하는 최초의 시적 진술은 “아으 의미 없음이여 /그러나 아으 느낌의 폭포여”1)라는 두 마디 속에 압축되어 있다. 이 세계와 삶이 결정적으로 의미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삶을 움직이는 어떤 느낌의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 그런데 위의 시적 진술은 아직 정언법적이거나 잠언투다. 그는 곧 수사학적 명제화가 초래하는 이런 자기 모순적 어투—의미 없는 세상에 뭔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를 버릴 것인데, 이 전환의 암시는 예컨대 「볼 만한 티브이 프로」나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등의 연작시를 시집 요소요소에 대못을 치듯 박아 넣은 방식 속에서 드러난다. 그 시편들이 의도하는 바는 아마도, 의미 없는 세계를 거짓 의미로 덮어씌우지 않고 정면 응시할 수밖에 없을 때, 그래서 이 세계를 망연한 ‘느낌’들만으로 살아내야 할 때 요청되는 어떤 존재 방식과 그 시적 서술 방식의 구축일 것이다.

두 번째 시집 『유리 이야기』(2003)는 그런 시도의 전면적 실천이 다. 무의미하게 들끓는 그 ‘느낌’들의 정체를 밑바닥까지 찾아 헤매는  방식으로, 이 연작 시편은 결국 무의식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거기서, 무의식의 서사 아닌 서사, 하염없는 시적 서사를 빚어낸다. 그 발화 주체는 크게 ‘나’와 ‘유리’와 ‘초록 괴물’로 나뉘지만 끊임없이 분 열하거나 합쳐지고 있으며, 그 진술 방식은 얼핏 초현실주의자들이 약물에 취해 내뱉는 자동기술의 형태를 띠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가 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약물에 취한 디제이DJ가 무의식 속에 내장된 음악적 자료들을 즉흥적으로 틀어주고 병치시키고 편집하고 조작하는 방식과 흡사한, 일종의 자율적 ‘모듈’에 의한, 성기완풍의 독특한 자동기술이라고나 할까. 이때 지적되어야 할 사항은, 그것이 아무리 자동기술이라 할지라도 언어로 행해지는 기술(진술)인한, 약물에 취해서도 무의식에 개입하는 교묘한 의식이 역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면(따라서 진짜 문제는 의식-무의식의 총체다), 그래서 “그 ‘무엇’의 그림자일 뿐”인 ‘흔적’으로서의 심층적 무의식도 이미 구조화되어 있다는 면이다. 위 시집이 무의식의 도식성과 그것을 은폐하는 변신의 방식들을 환각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뒤에 감추어진 어떤 작동 원리를 문제 삼게 만든다면, 그 연장 혹은 병렬의 차원에서, 세 번째 시집 『당신의 텍스트』(2008)에는 흔히 무의식의 근원이라 일컬어지는 성적性的 욕망과 그 나락의 온갖 모습들이 파편화된 형태로 가득 차 있다. 앞의 시집과 는 반대로, 여기서는 ‘서사’ 대신 날것 상태의 온갖 원초적 느낌들이 날뛴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모종의 자유와 새로움을 시위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성적 체위를 시험해보는 듯한 욕망의 발현 행태들은 무의미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몸부림의 재확인인바, 초점은 그 몸부림조차 어떤 ‘한계’ 속에 패턴화되어 있다는 것에 맞춰진다. 더구나 그 허망한 몸부림은 닫힌 개인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사회적 삶의 양태나 예술의 차원에서마저 동질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으로 표출되는 양상이 폭로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온 세계가 무의식의 유리병 속에서 ‘텍스트’로 출렁인다. 너와 나, ‘삼인칭’인 ‘우리’는 아무리 출렁여도 반복되는 어떤 존재론적 문법 체계에 구속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혹시, 텍스트 밖으로 일탈하거나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를 내파시킴으로서 텍스트에서 해방될 길은 없을까? “진정한절망의 혁명”은 가능할까?

그런 물음에 관한 지난한 탐색의 장이 네 번째 시집 『ㄹ』(2012)에서 펼쳐진다. 앞의 시집에서도 드문드문 편린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시집은 최대한 언어에서 의미를 분리시키며 의미가 박탈된 언어로도 시가 생성될 수 있는가를 실험하려 한다. 이 실험 뒤에는 의미를 추구하지 못하는/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어려운 질문이 덧대어져 있다. 의미가 제거되고 남은 언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지러운 소음(노이즈)이거나 단순한 소리일 것이다. 소음과 소리는 그 존재 층위와 존재 방식이 약간 다르다. 소음이 의미를 전달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혼돈스런 바벨의 언어와 같다면, 소리는 애초부터 기의(의미)와 무관한 기표에 견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시인의 상상 속에서, 이제 언어는 정상적인 의미 전달 기호가 아니라 서로에게 그저 청각적 파동으로 작동하는 소음이나 소리의 기호가 된다. 그리고 여기가, ‘소음-시’와 ‘소리-시’가 꿈 트는 자리일 것이다. 이때 시인은, 혹은 시 그 자체는, “더자유롭기위해뜻을버린음악”과도 같은 무엇인가를 내뿜는 하나의 발성기관이 된다. 그러면 발성된 말들은 이제 소리의 시스템 속에서 배치되고 교차되고 반복되고 혼융되며 허공을 흘러갈 터인데, 그렇게 흘러가면서 빚어지는 어떤 음악적 울림과 충격을 생산코자 하는 것이 혼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소음-시’와 그것을 초월하려는 순수 ‘소리-시’라 할 수 있다(그의 소리-시들은 한국어의 순수한 음향적 구성에 관한 많은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순간순간 성기완의 시들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저 처절한 고통의 느낌과 몽환적 아름다움의 느낌 사이에서! 현재로선, 여기가 성기완 시인이 도달해 있는 시적 몽상 또는 욕망의 끝자리인 듯하다. 물론 그의 이러한 욕망이 당장 우리의 현실적 삶에 직접적으로 이양되고 실현될 수는 없다. 현실은 태초의 언어에 내장된 지시성과 의미 작용의 기제를 제거한 언어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이런  모순 결합적 반전의 상상력이야말로 언제나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온 단서가 되지 않았던가…

김현 선생이 타계한 48세의 나이에 이른 그가 보다 근본적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새로운 상상세계를 실험하고 형태화하는 데 망설임이  없길 바라며, 김현문학패의 시인 부문 첫 수여자로 선정한다.

선정의 말

한유주 / 거짓 기억과의 싸움
끝없이 이야기를 지우는 소설 쓰기

2003년에 스물한 살의 나이로 등단한 한유주에게도, 이 세계는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삶과 언어의 실존 공간이다. 아니, 이 작가의 젊음이 내던져져 있던 21세기 초입의 세계는 어쩌면 성기완 시인의 젊음이 겪은 1990년대의 세계보다 더욱 가증스럽다. 작가는 2001년 뉴욕의 한복판을 폭파시킨 ‘9・1 사태’와 그 뒤를 잇는 야만적 전쟁을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충격적으로 목격한 세대에 속하는데, 그를 혼 돈과 고뇌에 빠트리는 것은 전파 미디어를 통해 허구의 영화를 보듯 목격한 그 “장면은 (실)감각 너머에 있다”는 점(“내 기억은 전파를 타고 왔으므로 세계는 14인치 텔레비전 화면 하나로 축소되어 있었다”)과 그렇게 폐허화된 세계가 어느 틈에 거짓 수사학의 포장과 장식으로 뒤덮여버렸다는 점이다.

작가로서의 한유주의 출발점은 “우리 세대는 수사학이 선인 세대다. “[…] 우리에게 언어는 다만 치장일 뿐이다. 치장된 언어는 윤리적으 로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는 자의식이다. 현실 세계가 “잘못된 전언”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언제나 잘못 전해진 이야기들이 문제였다” 는 인식이야말로 차후 그의 소설 세계를 이끌어가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이 될 것이다. 첫 소설집 『달로』(2006)의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인식은 곧 ‘이야기’라는 것에 대한 회의와 비판, 더 나아가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가능성의 실험으로 이어진다. 이 순간, 이 작가에게 또 ‘전위적’이니 ‘메타-소설적’이니 하는 상투적 수식어를 붙이고 그 일반론이나 나열하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자. 그런 수식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무능한 비평가들이나 사용하는 헛되고 무용한 수사학이 되기 일쑤다(더구나, 진정 소설다운 소설치고 ‘소설에 대한 소설’이 아닌 경우가 있었던가). 그러므로 정말 필요한 비평 작업은 그런 선험적 관념의 연역적 대입이 아니라, 이 작가만의 특수한 소설관을 작품의 실체적 분석으로부터 추출해내 그것을 기존의 소설론과 대조하며 그 차이나 변화를 해석하고, 의미와 가치를 논하는 것이리라.

한유주의 작품들을 굳이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읽더라도, 그 전에, 그에게 ‘살다’와 ‘말하다’—더 나아가 ‘쓰다’—는 동전의 앞뒤처럼 겹쳐진 동사이며 이 둘을 매개하는 것이 기억이라는 점을 명확히 전제해야 한다. 개체로든 공동체로든 삶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기억이고, 이 기억의 핵심적인 보존 도구는 말(글)이며 그 보존 장치가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가 자존적 자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마주하며 살고자 했을 때 맞닥트린 문제는 난감하게도, 자신이 간직해온 기억이라 것들이 어떤 숨어 있는 손의 “직조 기술”로 만들어져 주입된 “가짜의 기억”이라는 직관과 진짜 기억은 “모두에게서 잊혀졌다”는 직감이다. 그렇다면 진짜 기억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거꾸로 “말 아닌 모든 것” 속에, 즉 감각 속에 “소리로, 체취로, 뿌연 영상으로” 존재한다. 그 “유령과도 같은 기억”을 ‘치장’이 아닌 언어, 말다운 말로 “말하고 싶다”는 그의 작가로서의 첫 욕망은 그런 인식으로부터 발아한다. 말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기억을 새로이 말로 존재시키고자 하는 이 욕망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실현 가능할 것일까? 아마도 작가는 그에 적합한 어떤 “말하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고 믿었고, 처음엔 감각만으로 살아 움직이는 음악과 이형동질적인 어떤 글쓰기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에서 과거를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데 착안하여 음악의 분신과도 같은 언어 세계를 작곡해보려던 야심은 그러나 곧 난관에 부딪힌다. 이런 시도는 일면 성기완의 시적 실험과 내통하는 듯이 보이지만(‘얼터너티브’ 음악 세대가 공유한 감수성일 수 있다), 그 전제에서부터 근본적인 제약이 가로놓여 있다. 성기완의 ‘소리-시’는 의미가 제거된 언어를 오로지 소리 기호로 다루며 그 음가의 집합 체계를 구성하는 방법론을 취할 수 있었던 반면, 한유주의 ‘음악-소설’은 진짜 기억을 되살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어서 그 기억의 처소인 현실에 대한 언어의 지시성 즉 의미를 완전히 제거할 수가 없다. 그것이 아무리 오염되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제 작가의 고뇌는 다른 방향으로 깊어진다. ‘나’는 그 오염된 언어의 체계 자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그것에 온전히 지배당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나’를 지시하는 고유명사로서의 내 이름마저도 그렇다. 그로 인해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지겨웠지만, 이 지겨움을, 온몸의 혈액을 타고 흐르는 유기적인 지겨움을, 몸 밖으로 떼어내기란 요원했다”. 이때 발생하는 더욱 곤혹스러운 의혹은, 그 언어 체계에 갇힌 상태에선 무슨 글을 쓰든 그 언어 체계의 자원으로 쌓여 있는 글의 전범들을 베껴 쓸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나’가 꿈꾸었던 글쓰기는 흔적도 없이 매몰되는 것이 아닐까. 이 불안감은 『얼음의 책』(2009)의 처음부터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2011)의 끝까지 강박적으로 반복되며, 다양한 문제의식과 방황과 모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소중한 결실 하나를 낳는데, 그것은 기존의 글쓰기 방식을 내파하는 독창적 방법론의 발견 혹은 발명이다.

기존의 언어 체계를 대체하는 독자적 상상 세계의 구축이 당장은 불가능하다면, 우선 그 기존의 체계를 조금씩 허물어가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거기서부터 작가는 “다시 시작한다”. 이제 그가 “쓰고 싶은 것들은 서술도 묘사도 진술도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소설을 쓰고 싶다”. 이 역시 어렵지만, 내기를 걸어볼 만한 발상이다. 일반적인 소설들은 분절된 시간 단위의 행위들의 선적인 연쇄를 서술한다. 그리고 묘사를 통해 그 연쇄적 흐름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고, 그 개연성을 그럴듯하게 진술한다. 그럼으로써 아무리 비정상적인 행동도 어떤 필연적 운명의 결과인 양 세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작가는 그 직선적 개연성의 고리를 끊고 분절된 이야기 요소들을 순간 속에 멈춰 세운다. 매순간, 그 순간 속에서, 이미 이야기된 행위들은 부정되거나 그 순간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행위들이 다면적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그것을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단어나 문장들도 언제나 수정과 변환이 가능하다. 요컨대, 어서 의미를 결정지으려는 거짓 이야기를 끝없이 차단하고 지우면서 반대로 이야기의 미결정성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독특한 언어 풍경이 한유주에 의해 소설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리 소설 이전의 소설 혹은 소설 이후의 소설이라 불러야 좋을지 모를, 이 해체적인 글쓰기가 펼쳐 보이는 언어 풍경들이 역설적으로 신비롭고 아름답기조차 한 것은, 어쩌면 유보 상태에 있는 음악적 소설에서 시도되었던 일종의 언어 작곡법이 의미를 비워가는 언어와 더 잘 어울린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작가의 문학적 성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소설 문체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다는 점, 더 나아가 한국어의 표현 가능성을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문으로만 써나간 한 단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소설적 추구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부정문 사용의 용례들은 단연 독보적이다. 그것은 그의 해체 작업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또 다른 창조라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 연장선에서, 작가의 첫 장편 『불가능한 동화』(2013)는 그의 소설적 모험이 혹시 일시적이며 단편적인 실험에 그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불식시킨다. 장편의 규모로, 1부와 2부의 대칭적 구도 속에 그의 다면적 탐색들을 상대화시키며 하나의 전체적 텍스트로 조직화한 이 소설은, 그의 미학이 한국문학의 미래를 열어가는 길 위에 세워진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스스로 시위하고 있다.

천국의 도서관에서 김현 선생이 읽을 ‘행복한 책읽기’ 목록에도 한유주의 소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공교롭게도 성기완과 한유주는, 의미가 상실된 세계 속에서의 삶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극복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바, 결과적으로 그러한 면모가 이번 제1회 김현문학패의 주제가 되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살아서 이 세계의 무의미와 싸워야한다”던 김현 선생의 읊조림이 새삼 떠오른다…


김현 소개

김현의 삶과 문학

한국의 문학비평사는 김현(본명: 김광남, 1942~1990)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작과 비평의 관계, 문학 이론과 실제 비평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며 한국문학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눈부신 전망을 제시했던 그는 빼어난 글쓰기를 통해 평론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켜준 ‘비평작가’로까지 칭송받고 있다. 한편으론 성실한 프랑스문학자이자 번역가로서 프랑스 문학 작품과 비평의 올바른 수용과 활용을 위해 노력해 온 그는, 문화와 예술 전반에 걸친 날카로운 관찰자의 혜안을 가지고 문학지 및 출판 편집인으로서의 활동 역시 열정적으로 수행하면서, 지성과 문학 현장의 ‘술꾼’으로서도 잊지 못할 추억과 인간적 관계를 남겼다.

모국어로 공부하며 성장한 첫 한글세대이며 4.19세대인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 개성과 다원주의의 가치관을 신념하고 또 실천하였고, 우리 문화와 문학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고 샤머니 즘과 니힐리즘이라는 시대적 병폐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성찰을 멈추지 않았다. 나아가 미래를 향해 싹트는 새로운 세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갈무리하면서 그들의 실험정신을 일관되게 옹호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후원자의 역할을 마다치 않았다. 때 이른 타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열어 놓은 넓고도 깊은 비평 세계는 그 뒤의 후속세대들이 회피할 수 없는 문학적 전범으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1942년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성장한 김현은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1962년 『자유문학』에 「나르시스 시론」을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곧 김승옥‧최하림 등과 『산문시대』 동인을 결성하게 되고, 그의 열정적 동인 활동은 이후 『사계』, 『68문학』 등을 거쳐, 1970년에 김병익‧김치수‧김주연과 함께 계간 『문학과 지성』을 창간하고 1975년에 문학과지성사를 창립하는 문학사적 결실로 맺어진다.

1971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로 취임한 후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로 옮겨 재직하면서, 그는 프랑스문학 연구자이자 한국문학 비평가로서 더욱 왕성한 활동량과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한국문학 영역에서는 문학사 기술의 새 바람을 몰고 온 『한국문학사』(김윤식 공저)와 『한국문학의 위상』을 비롯하여, 『상상력과 인간』 『사회와 윤리』로부터 『문학과 유토피아』 『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 『책읽기의 괴로움』 등을 통과해 마지막 『말들의 풍경』 에 이르는 일련의 평론집들이 그의 놀라운 공감 능력과 정치한 분석‧해석을 과시하고 있으며, 프랑스문학 영역에서는 『프랑스 비평사』를 시발점으로 바슐라르, 제네바학파, 르네 지라르, 미셸 푸코 등의 비평 세계와 방법론을 추적하는 역작 연구서들과 편서들이 그의 넓은 문학적 관심에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불행하게도 40대 중반의 나이에 발병한 간염이 서서히 그의 몸을 허물어나갔지만 그의 문학적 열정과 사명감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계속되는 집필‧연구 활동 속에 간염은 기어이 간암으로 악화되었고, 1990년 때 이른 그의 죽음을 몰고 왔다. 향년 48세.

김현의 책들

저서
  • 존재와 언어, 가림출판사, 1964.
  • 상상력과 인간, 일지사, 1973.
  • 사회와 윤리, 일지사, 1974.
  • 시인을 찾아서, 오늘의 산문선집, 민음사, 1975.
  • 김현 예술 기행, 열화당 민술문고, 열화당, 1976.
  • 한국 문학의 위상, 인문‧예술 총서, 문학과지성사, 1977.
  • 반고비 나그네 길에, 지식산업사, 1978.
  • 현대 프랑스 문학을 찾아서, 홍성신서, 홍성사, 1978; 증보 신판, 기린총서, 기린원, 1989.
  • 우리 시대의 문학, 문장사, 1979.
  • 문학과 유토피아, 문학과지성사 1980.
  • 프랑스 비평사: 현대편, 문학과지성사, 1981.
  • 프랑스 비평사: 근대편, 문학과지성사, 1983.
  • 문학사회학, 대우학술총서, 민음사, 1983.
  • 젊은 시인들의 상상 세계, 인문.예술 총서, 문학과지성사, 1984.
  • 책읽기의 괴로움, 민음사, 1984.
  • 두꺼운 삶과 얇은 삶, 나남 산문선, 나남, 1986.
  • 제네바학파 연구: 제강의 꿈, 현대의 문학 이론, 문학과지성사, 1986.
  •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 나남신서, 나남, 1987.
  • 분석과 해석, 문학과지성사, 1988.
  • 시칠리아의 암소: 미셸 푸코 연구, 현대의 문학 이론, 문학과지성사, 1990.
  • 전체에 대한 통찰, 정과리 편, 나남 문학선, 나남, 1990.
  • 말들의 풍경, 문학과지성사, 1990.
  •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2.
공저
  •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김병익‧김주연‧김치수‧김현), 민음사, 1972.
  • 한국의 지성(서기원‧김윤식‧김치수‧김병익‧김현‧김주연‧최창규), 문예문고, 문예출판사 1972.
  • 한국문학사(김윤식‧김현), 민음사, 1973.
  • 불문학개론(이휘영‧김붕구‧오현우‧홍순민‧이환‧정명환‧홍승오‧원유수‧김광남), 정음사, 1974.
  • 바슐라르 연구(곽광수‧김현), 민음사, 1976.
  • 20세기 이데올로기와 문학 사상(정명환‧이환‧송동준‧김현), 대학교양 총서, 서울대학교출판부, 1979.
편서
  • 프랑스 명시선(박은수‧김현 공편), 동화문고, 동화출판공사, 1972.
  • 문학이란 무엇인가(김주연‧김현 공편), 문학과지성사, 1975.
  • 이광수, 작가론 총서, 문학과지성사, 1977.
  • 최인훈, 우리 시대의 작가 연구 총서, 은애, 1979.
  • 정현종, 우리 시대의 작가 연구 총서, 은애, 1979.
  • 현대 비평의 혁명, 홍성신서, 홍성사, 1979; 신판, 기린총서, 기린원, 1989.
  • 살아 있는 시들 1, 홍성사, 1983.
  • 살아 있는 시들 2, 홍성사, 1983.
  • 앵무새의 혀, 문학과지성 신작 시집, 문학과지성사, 1985.
  • 수사학, 문제와 시각, 문학과지성사, 1985.
  • 장르의 이론, 문제와 시각, 문학과지성사, 1987.
  •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현대의 문학 이론, 문학과지성사, 1989.
  • 사르트르의 문학적 세계(김치수‧김현 공편), 문학과지성사, 1989.
역서
  • 아스투리아스: 강풍, 현대세계문학전집, 신구문화사, 1986.
  • 카뮈: 행복한 죽음 (김붕구‧김현 공역), 과학사, 1971.
  • 졸라: 목로주점, 동화문고, 동화출판공사, 1972.
  • 파쥬: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문예문고, 문예출판사, 1972; 개역 신판, 중앙신서, 중앙일보사, 1980.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문예출판사, 1973.
  • 발레리: 해변의 묘지, 세계시인선, 민음사, 1973.
  •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세계시인선, 민음사, 1974.
  • 발레리: 드가‧춤‧데상, 열화당 미술 문고, 열화당, 1977.
  •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삼중당 문고, 삼중당, 1977.
  •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홍성신서, 홍성사, 1978.
  • 로베르: 이해할 수 없는 일들 (김현태‧김현 공역), 문예중앙, 1980년 봄호 별책 부록, 1980.
  • 골드만: 인문과학과 철학 (김현‧조광희 공역), 인문.예술 총서, 문학과지성사, 1980.
  • 미쇼: 바다와 사막을 지나 (김현‧권오룡 공역), 열음 세계시인선, 열음사, 1985.
  • 발레리: 발레리, 혜원 세계시인선, 혜원출판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