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도키-자이푸르 : 한유주

한유주3

내가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열리는 문학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된 것은 두 해 전쯤 북경에서가 처음이었다. 영국에 거주하는 에이전트가 메일을 보내 항공권만 자비로 부담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규모가 작은 페스티벌이라 숙박은 제공되지만 비행기 편까지는 어렵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러마 했다. 2013년경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나게 된 에이전트는 영어로 번역된 내 단편을 우연히 읽었다며 계약을 원한다고 했고 나는 서류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했다. 그 후로 그는 내 장편을 영어권 국가에서 출간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것이 에이전트의 통상적인 일이라지만 언젠가 그의 현황보고 메일에서 기나긴 좌절과 무응답, 그리고 기다림의 목록을 보았을 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소 개의 속성을 가진 나는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고 생각했다. 해서 나는 북경에 가게 되었다.

  북경

상해에는 가본 적이 있지만 북경은 처음이었던 나는 그 크기에 압도당했다. 삼박 사일의 짧은 일정이었으므로 관광지에 가볼 생각은 하지 않았으며 건물과 도로와 인파의 규모에 압도된 채로 숙소 주변을 돌아다녔다. 내가 참여해야 할 세션은 세 개였다. 첫 번째 세션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행사가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만 진행되었던 것과 그날 같은 에이전시 소속으로 십대 시절 탈북해 중국을 거쳐 남한에 정착한 탈북 작가를 처음 만났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중국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는 세션 도중에 통역 없이 발언해야 했던 내가 곤란을 겪을 때 도움을 주었다. 다음날 우리는 조식을 같이 먹었다. 그는 지금 비록 남한 여권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 공안이 두렵다고 했다. 정부 당국에서 참여 작가들에게 할 질문은 물론 예상 답변까지 주최 측에 요구했다는 얘기를 에이전트로부터 들었던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보다 한두 살 많았던 그는 남한에서 무탈하게 대학을 다녔던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세션은 일종의 낭독회였다. 미리 주어진 주제는 위스키였고 나까지 네 명의 작가가 위스키에 관해 뭔가 쓴 것을 읽는 자리였다. 초고층 건물들 사이에 아담하게 들어선 작은 서점 2층에 마련된 행사장에 들어섰다. 작가와 관객을 포함해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온 사람들로 보였다. 나는 난생 처음 영어로 긴 글을 써야 했고 중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영어가 모국어인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어째서 중국에서 오직 영어로만 문학 관련 행사를 진행하는가? 위스키라면 수영장 하나를 채울 만큼 마셨을 나는 위스키와 관련된 짧은 거짓말 하나를 낭독했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에이전트는 한국에서도 이처럼 국제적인 문학 행사가 열린다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오직 영어로만 문학 관련 행사를 진행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봤지만 일단 그런 행사 자체가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다음날 있었던 세 번째 세션은 문학 퀴즈쇼였다. 나는 미국에서 왔다는 저널리스트와 한 팀이 되어 출전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제시되었는데 기억나는 것으로는 같은 팀원의 설명을 듣고 작품 제목을 맞추는 것이 있었다.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맞출 수 있었지만(팀원의 설명이 훌륭했다)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다>를 “아프리카”라는 단어 없이(규칙이 그랬다) 영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먼저 집필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리어 왕…?”이라고 대답했다가 처참하게도 “땡!”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도 난다. 사회자의 설명을 듣고 작품 제목을 맞추는 어떤 문제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렉상드르 뒤마”를 외쳤지만 사실 정답은 “삼총사”였다. 하지만 사회자는 짧은 영어로 애쓰는 내가 불쌍했던지 정답 처리를 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나의 팀은 우승했다. 미국인 저널리스트가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상패나 상품은 없었지만 유쾌한 시간이었다. 다음날 북경을 떠날 때 공항 카페테리아의 직원은 water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숙소에서, 택시에서, 카페에서 마주친 몇 되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영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영어로만 국제적인 문학 행사를 주최할 때의 장점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나는 비행기에 탑승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도키

지난해 5월 나는 아일랜드에 다녀왔다. 도키라는 지역에서 열리는 문학 축제에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인으로 영국에 살고 있는 나의 에이전트와 그의 남편은 해당 지명을 달키라고 발음했지만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이 달키는 영국식 발음이며 아일랜드식으로 발음하면 도키가 맞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도키도키라는 일본어 단어를 알고 있었다. 두근두근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 사전을 찾아보니 그때그때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암스테르담 공항에 내려 하이네켄 생맥주 한 잔을 급하게 마시고 통근용이지 않을까 싶은 시티호퍼 기종 비행기로 갈아탔다. 승객들 중 백인이 아닌 사람은 나뿐으로 보였다. 승무원이 카트를 밀고 좁은 복도를 지나가며 음료를 나눠주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은 왜인지 시종 불안한 표정이었는데 승무원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탄산수를 받아든 옆자리 남자는 승무원이 지나가자 나를 곁눈질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이, 아이 라이크 스파클링 워터. 더블린 공항에 착륙했을 때 입국심사대로 가는 줄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유럽연합 거주자들용, 다른 하나는 비유럽연합 거주자들용이었다. 후자를 위한 심사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VIP가 된 기분으로 길게 늘어선 유럽연합 시민권자들을 빠르게 지나치며 작은 비행기였으니 저 줄도 생각보다는 빠르게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더블린에서 도키까지는 차로 삼십 분가량 걸렸다.
다음날 오전에 에이전트와 그의 남편, 그리고 같은 에이전시 소속 작가 몇 사람을 만났다. 이는 이제부터 짧은 영어로만 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전부 같은 숙소에 묵고 있었고 숙소는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린 언덕 중턱에 있었다. 영국인 저널리스트로 꽤 오래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언젠가 김일성과 한 테이블에 앉은 적도 있다는 작가가 말하길 밴 모리슨과 보노가 근처에 살고 있다고 했다. 도키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급 거주지이며 우리가 묵는 숙소 커피숍에 가끔 밴 모리슨이 커피를 마시러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체류하는 동안 밴 모리슨을 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 5월의 아일랜드 날씨는 꽤 쌀쌀하다고 들었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다소 더울 정도였다. 나를 제외한 유럽인들은 영국과 아일랜드를 강타한 열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런던이 얼마나 덥냐고 물었더니 에이전트의 남편은 기온이 26도 정도로 올라갔다고 대답했다. 이런 날씨를 열파라고 부르다니, 나는 혹서와 혹한을 오가는 한국 날씨를 생각하며 비뚤어진 자부심을 느꼈다. 아일랜드에서 열리는 축제였으므로 공용어는 당연하게도 영어였다. 당연히 통역을 요청한 바 있었으나 에이전트든 주최측이든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참석해야 할 세션은 오후에 있었다. 에이전트와 나, 영국인 저널리스트, 그리고 이제 막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다는, 중국에서 만났던 탈북 작가와 내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영국인 저널리스트는 한국에 오랫동안 거주해왔으므로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았지만 제1언어는 당연히 영어였다. 우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한국의 집값과 전세 제도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북한이었다. 따라서 탈북 작가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이 쏟아졌다. 그날 저녁에 있었던 리셉션에서 사람들은 나와 북한 출신 작가에게 끝없이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요, 사우스? 노스?” 나는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할 때마다 이 질문이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닌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북한 출신 작가는 내게 인간관계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고 우리는 그전보다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다. 블룸스데이 하루 전날이었다.
다음날 행사장으로 가던 도중 제임스 조이스로 분장한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제임스 조이스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때까지 『율리시즈』를 끝까지 읽지 못했던 나는 죄책감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며 행사장에 들어섰다. 구청 문화회관이지 않을까 싶은 건물이었고 그날의 주제는 “문화적 전유”라고 했다. 나와 같이 무대에 오를 사람들은 인도의 남성 정치가 겸 작가, 호주에서 아프리카 이민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모슬렘 여성 저널리스트, 그리고 미국 출신의 흑인 남성 시인, 영국의 백인 중년 남성 소설가였다. 이 틈바구니에서 내가 문화적 전유에 대해 대체 무슨 말을 (그것도 영어로) 할 수 있을지 몰라 당황했던 나는 그날 아침 짧은 글을 하나 썼다.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었다. 제각기 다른 영어로 초스피드로 빠르게 발언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겨우 기회를 잡아 써온 글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주제와는 (당연히) 좀 어긋나 있었다. 같이 무대에 오른 패널들은 친절했지만 모슬렘 여성 저널리스트와 백인 중년 남성 소설가 사이에 말싸움이 붙었다. 후자는 요즘 쓰는 소설에 옛날 영국에서 흑인들을 비하하는 용도로 쓰였던 단어를 집어넣었는데 편집자가 이를 문제 삼았다고 했다. 하지만 소설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므로 자신은 고집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에 모슬렘 여성 저널리스트는 격분하며 당신 책은 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 중간에 끼어 있었다. 나의 보잘것없는 정체성이 그들 사이에서 한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인도의 남성 정치가 겸 작가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가 쓴 글에 대해 한 마디를 보탰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나쁠 대로 나빴고 다행히 할당된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후에 에이전트는 나를 해당 세션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고, 반드시 두 세션에 참여해야 하는데 남은 것이 그것 하나뿐이었다고 말했다. 나름대로 값진 경험이었으므로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자이푸르

올해 1월에는 자이푸르에 다녀왔다. 언젠가 자이푸르 문학 축제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델리 공항 환승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일찍 자이푸르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체크아웃을 하자마자 직원이 따라붙었다. 혹은 내가 그를 따라가야 했다. 루피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아 환전을 해야 했는데 직원이 하도 서두르는 통에 기회가 없었다. 보딩패스를 받아들고 보안검색대로 가려는데 내 담당 직원과 같은 제복 차림인 사람들 둘이 동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을 데려왔다. 나와 일행이라고 했다. 목감기에 걸린 상태였던 나는 기침이 멎질 않아 그날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백인 남성과 먼저 악수하며 인사를 교환했다. 그는 영국인 저널리스트였다. 이어 동양인 여성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말을 건네는데 돌연 그가 물었다. 한국분이세요? 나는 그렇다고 말했고 그러자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내밀었던 손을 어색하게 거두며 다시 마스크를 썼다. 한국계로 판명된 동양인 여성과 영국인 남성은 영어로 막힘없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뻘쭘하다고 하는 것인가, 뻘쭘하다는 표준어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생각하는 동안 기침이 시작되었다. 상비약으로 소지했던 스트렙실을 하나 꺼내 입 에 넣었는데 매운 사탕을 먹고 마스크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기침과 매운맛과 마스크의 조합은 눈을 아리게 했고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꼴이 우스워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우리가 (혹은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던 직원들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뭔가 문제가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말씀하세요. 정말이지 내가 원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스트렙실은 매웠고 델리 공항 내부의 공기는 혼탁했으며 한국계 여성과 영국인 남성은 나를 흘끔거리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사탕이 매워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비행기에 탑승했고 곯아떨어졌다 일어나보니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자이푸르 공항에 내려서도 결국 환전을 할 수가 없었다. 짐이 너무 늦게 나왔고 호텔에서 보낸 미니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나와 한국계 여성은 같은 숙소에 체류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차례대로 버스에 올랐지만 그는 나와 조금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주책없이 기침이 계속 터지는 바람에 나는 스트렙실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마스크는 벗은 채였다.
듣던 대로 자이푸르 문학 축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어느 옛 궁전이었으리라 짐작되는 행사장에는 끝없이 보이는 얼굴들 위로 공작이 게으르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에이전트와 그녀의 남편을 겨우 만났다. 내게 할당된 세션은 두 개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작가들이 낭독하는 시간, 그리고 다른 작가 둘과 각자의 소설에 대해 말하는 시간. 첫 세션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한 시간 동안 일곱 명의 작가가 각자의 작품을 낭독하는 것이었으므로 한 사람당 주어진 시간은 5~7분에 불과했다. 한국문학에 대해 뭔가 한 마디라도 득이 될 만한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강박은 절로 해소되었다. 인도는 워낙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이므로 영어를 주로 상용한다고 했다. 과연 모든 행사들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주어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 한국어 문장에 대해 떠듬떠듬 말하고 나자 주어진 시간이 끝났다. 관객들 중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했다. 내 친구는 힌디어로만 글을 쓰며 다른 언어로 번역되기를 원치 않는데 당신도 그런가요? 인산인해라는 말을 실감하며 겨우 궁전 밖으로 나왔을 때 저마다 자신의 택시나 툭툭을 타라는 기사들이 몰려왔다. 나는 제일 먼저 다가온 사람에게 호텔까지 얼마냐고 물었고 그는 400루피라고 했다. 호텔에서 겨우 환전을 할 수 있었던 나는 재빨리 400루피가 한국 돈으로 얼마 정도인지 계산한 후 그의 툭툭에 올랐다. 그는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사우스 코리아라고 대답하자 그는 오, 굿 컨트리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굿 컨트리의 의미를 물었고 그는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 마이 잉글리시 이즈 리틀 리틀.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영어도 작고 또 작기 때문이었다. 후에 그가 부른 400루피가 통상적인 요금의 네 배 정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알려준 어느 영국인은 내게 자이푸르의 경제를 파괴하지 말라는 농담 비슷한 말을 던졌다.
다음날 역시 행사장으로 가기 위해 축제 측이 제공한 셔틀버스를 탔다. 한국계 여성 작가가 이미 탑승해 있었지만 나를 본체도 하지 않았다. 후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한국계 미국인과 예의 없음과는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 내 옆에는 인도인 작가 부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 가본 적이 있다며 국립박물관이 아주 훌륭했다고 말했다. 전날 다른 작가들의 무대를 기웃거리며 남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중국과 인도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어깨너머로 알게 된 나는 이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나도 조그마해서 보이기나 할까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나는 그들에게 영어로 글을 쓰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영어로 쓴 작품도 인도 문학으로 간주됩니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힌디어와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작가들이었는데 영어로 작품을 쓸 경우 영어권 국가로 훨씬 더 빠르게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영어가 더 편리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로만 사고하며 한국어로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얘기였다. 이후 세션에서는 모로코계 프랑스인 작가와 한 무대에 올랐다. 이번에도 영어가 발목을 잡았다. (내가 무대에 올라갈 때 에이전트는 Break your leg!라고 덕담했다.) 어째서 모든 사람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거라는 전제가 있는 걸까? 언젠가 인간이 화성에 가게 된다면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공용어는 역시 영어가 될까? 나는 늘 민족 문학이라는 키워드에 의심과 관심, 그리고 회의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이 조어를 바라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침내 모든 행사가 끝났던 날 저녁, 나는 방에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인도의 경제 전망에 관해 토론 중이었다. 이런저런 얼굴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문득 익숙한 인물이 나타났다. 도키에서 만났던 인도인 정치가 겸 작가였다. 그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어떤 논의를 펼치고 있었다. 영어 듣기 평가를 하는 기분으로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던 나는 이내 텔레비전을 끄고 다시 이리저리 흩어진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