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의 밤과 안개-영화 받아쓰기(ciné dictée) : 김태용

천당의 밤과 안개

영화를 기억하는 시간과 영화 속을 헤매는 자들을 기록하는 시간은 결코 같지 않다.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본다. 상영이 취소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입안에 있는 레몬사탕이 좀처럼 녹지 않는다. 내일은 더 추워진대. 추워진대?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우리는 외투를 벗는다. 두 번 접고 네 번 접어서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그 위에 두 팔을 늘어뜨린다. 무릎 사이로 옷이 흘러내린다. 사랑하는 우리의 무릎들. 하품을 한다. 불이 꺼진다. 235분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린다. 아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영화 밖의 시간이지 영화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235분 이후의 시간을 생각한다. 영화가 끝나고 우리의 얼굴들이 너무 부끄러워 극장이 무너져 내리는 망상에 시달릴 때가 있다. 헛된 흥분이 우리의 뺨을 스친다. 아직이다. 영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시작될 수 있다면, 영화의 시작점을 정확히 말할 수 있다면, 영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시작된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계속 눈을 깜빡거린다.

단발머리에 붉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9년 전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 에서 본 오래된 소녀다, 남산타워 안에 있다. 창밖을 본다. 창밖은 보이지 않는다. 먼지 혹은 안개로 뒤덮인 풍경에 손을 대는 여자. 그전에 여자는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누구일까? 천당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준비된 목소리. 여자는 몇 번이나 저 말을 연습했을까. 여자의 이야기는 시작되기 전에 이미 끝난 것 같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누구일까? 그리고 천당은 어디일까? 아니 무엇일까? 천당이라고 말했으니 천당을 믿어야 할 것이다. 천당의 요괴들을 기다린다.

영화감독 ‘왕빙’이, 그의 방이라고 짐작되는 곳에서, 찻잔을 앞에 두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앞에 카메라를 들고 있을 여자를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는 사라졌고, 여자는 천당의 좌표 상실점, 그러니까 영화의 언저리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왕빙은 계속 말한다. 누군가 그 말을 받아 적고 있을지 모른다. 타르코프스키의 이름이 언급된다. 공산주의도 등장한다. 천당만큼 가깝고도 먼 단어들. 어떤 영향 관계 속에서만 해석되는 작품들이 있다. 왕빙의 영화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왕빙의 영화는 우리에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 중국의 풍경이 보인다. 시속 몇 마력으로 달리는지 알 수 없는 차 안에서 찍힌 영상들이 펼쳐진다.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지나간다. 누가 풍경 영화의 리듬을 분석할 수 있을까. 영상의 사이사이 문자만 화면에 보인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문자들. 문자는 영화의 좌표를 지시하고, 영화에 대한 우리의 독법을 곤란하게 만든다. 문자를 위한 영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영화를 읽는다는 말은 불가능하다.

활극(活劇)이라는 한자가 화면을 잠시 채웠다 사라진다. 중국 호인들의 활극을 보는 마음으로 왕빙을 따라가는 카메라를 따라간다. 어느 정신병원 앞. 정신병원 촬영이 불허되고 왕빙 일행은 어딘가로 가고 있다. 누군가를 찾아가고 있다. 고산 지대의 좁은 길로 당나귀와 철근을 어깨에 인 사람들이 지나간다. 갑자기 왕빙이 카메라를 넘겨받아 장면을 만든다. 당황스럽고 매혹적인, 아주 잠시 동안의 일이다. 누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왕빙이 찍었던 영화 <세 자매>와 <아버지와 아들>의 인물들을 찾아간다. 윈난성에서 라오스 국경 마을을 찾아가는 길. 우리는 천당의 안개를 마주한다. 안개가 어디로부터 스며들어 시야를 채우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안개가 우리의 얼굴을 통과하고 있다. 통과하지 못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우리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다.

안개는 고무나무 정글 마을까지 따라와 온갖 가축과 짐승의 울음소리로 변한다. 사람들은 말하고 걷고 술을 마신다. 어떤 빈궁의 언어들을 사용해도 서술의 빈약함을 드러낼 뿐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영화적 거리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할 때가 있다. 왕빙은 사람들로부터 계속 말과 행위를 끌어낸다. 오로지 왕빙의 등 앞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왕빙이 사람들을 더 이상 마주하지 않으면 영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왕빙의 일상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왕빙은 사색하지 않는다. 왕빙은 가끔 단호하게 카메라 밖으로 나간다. 카메라를 끄라고 한다. 영원히 우리는 영화 속의 삶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천당의 얼굴. 정신병원으로부터 촬영 허가 연락이 오고 왕빙은 유도선수처럼 머리를 깎고 다시 나타난다. 검은 태양의 밤이라고 불리는 세계가 있다. 왕빙과 왕빙의 카메라와 왕빙을 따라가는 카메라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 왕빙의 영화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의 촬영 현장이다. 영혼의 실이 엉킨 사람들. 반드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의 관음적 기대를 무시하며 왕빙은 정신병동의 여기저기서 잠을 잔다. 잠이 드는 것인지, 잠에 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 왕빙은 잠을 잔다. 잠의 활극. 왕빙은 사색하지 않는다.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들. 왕빙을 관찰하는 사람들. 담배를 피우고 또 피우고 계속 피우는 사람들. 소리치는 사람들. 애써 침을 뱉는 사람들. 마르크스와 모택동을 언급하고 심지어 왕빙의 영화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약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약은 입안에서 얼마나 빨리 녹게 될까. 왕빙은 어느 순간 조수와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천천히 어쩌면 순식간에 사람들 앞으로 다가간다. 밤눈에 밝은 광학동물의 민첩함.

어느 저녁 왕빙은 조수에게 나무라듯 말한다. 줌을 쓰지 마라. 가까이 찍고 싶다면 카메라를 들고 그들에게 직접 다가가라.

병동의 휴게실 난로 앞, 왕빙은 또다시 잠들어 있다. 사람들이 주변에 앉아 있거나 서성인다. 유일하게 영화의 속도가 달라지는 지점이다. 무협과 난투의 홍콩영화를 연상케 하는 기법. 영원한 천당의 밤에 갇힌 열혈남아들. 이것은 누구의 꿈도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인민에게. 활극의 끝에서 만나는 영화 에세이. 기기묘묘한 사운드에 휩싸인 농촌 마을에 눈이 내리고 있다. 아직 밤이 아니고 안개도 밀려오기 전이다. 아이들이 뛰어가고 부녀자들이 걸어간다. 카메라는 어디에 있을까. 카메라를 든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왕빙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붉은 코트의 여자가 또다시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여자는 극장에 앉아 있다. 우리가 본 것을 여자가 보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여자는 수화기에 대고 연기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천당에 다녀왔어. 그리고 ‘루쉰’ 소설의 문장을 발화하는 목소리. 여자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 읽어주고 있는가. 초점이 빗나간 듯한 여자의 눈동자를 왜 우리는 계속 지켜봐야 할까. 명백하게 허구화시켜 놓은 이 장면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길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누구일까?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면 불이 켜진다. 사랑하는 우리의 무릎들. 우리는 무릎 위의 옷을 다시 입는다. 레몬사탕을 먹는다. 추위에 대해 말한 두 사람의 얼굴을 찾을 수 없다. 애초에 두 사람은 없었으니.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말 것. 밤이다. 그 무엇도 가능한. 가능하지 않은. 우리는 영화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영화를 기억하는 시간과 영화 속을 헤매는 자들을 기록하는 시간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