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는 눈을 멀게 하고, 이미지는 귀를 먹게 한다. 과연? : ‘사운드 이펙트 서울 2017’을 다녀와서

이현진

미디어는 세계의 목소리 그 지평 위에 군림해왔다. 심지어 그 세계를 뒤집으려는 혁명조차 전파의 자장 안에 있어야만 했다. 우리는 귀를 막고 TV를 볼 수는 있지만, 눈을 감고 TV를 들을 수는 없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2017. 12. 8 ~ 2018. 1. 31) <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 사운드 이펙트 서울 2017>은 ‘보이는 것이 믿는 것이다’는 확고함을 허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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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음향 기계는 조형물이 아닌 부속품이다. 하지만 그것이 비일상적인 조형물이 되는 순간 시감각은 청감각의 앞으로 이동한다. 전시장의 스피커 조형물은 청음의 차원을 넘어 시각화된다. 시각화된 작품은 소음을 내뱉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소음이 된다. ‘음향’과 ‘기계’는 인과관계를 깨고 동일성을 얻는다.

청각을 관람하는 행위는 결국 ‘보이는 것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이 불완전함을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관람객이다. 관객은 미디어의 매개이자 마감재이다.

관람객은 소리를 더듬는다. 소리는 쉽게 이미지화되는데, 그 이미지는 사실 관람객의 눈을 멀게 만든다. 칠흑 같은 늪에서 팔다리를 더듬어 앞으로 나가는 가는 사람처럼, 우리는 분화된 오감을 버리고 전혀 다른 차원의 전면적인 감각을 불러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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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개인을 지운다. 미디어 속의 ‘외침’은 흘러가는 풍경이다. 프레임 속에 던져진 개인은 편집되고 재현되고 버려진다. 미디어는 공동체를 잇는 순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개인은 사라져야 한다.

‘장영혜 중공업’의 <어 러브 슈프림>은 거대한 화면에 북한의 아나운서 ‘리춘히’를 표상하는 여인을 등장시킨 뒤, 자극적인 문구를 반복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15초 남짓한 짧은 시간에 문구를 전달해야 하는 광고처럼, 작품은 정치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발적인 언어를 점멸한다. 쏟아지는 언어의 폭발을 견뎌내고 나면 존 콜트레인의 음률만이 부스러기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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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떤 전시에서라도 작품의 ‘완벽한 관람’은 불가능하다. 권병준 작가의 <오묘한 진리의 숲>은 이 지점을 확인시키면서 동시에 기존의 전시 개념을 뒤집는다. 관람객은 헤드셋을 착용하고 작가가 제시한 소리 지도를 따라가며 귀 기울인다. (지도에 등장한 모든 소리를 구분해 들을 수도 있으며, 아니면 순서를 무시하고 자리를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소리를 덩어리로 감상해도 된다) 마치 숲에서 매미나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는 어린아이처럼. 그 청음의 길에 올라서면 전시장의 모든 공간은 재구성된다. 보이는 것은 듣는 것 아래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적어도 기왕에 지녔던 시각적 고정 감각은 사라진다.

 

맹아

소리에 눈이 먼다
그는 나를 위해 발밑에 숫자를 적어두었다

지도 위에 그는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다 대체로
천둥이 들린 후에야 번개가 친 것을 알아채는 부족처럼
눈앞에 등이 보여야 무언가 지나간 기척을 아는 것이다

자 음향의 검부러기를 헤집어보자 손에 가시가 잔뜩 묻거든 모른척하자
질척이는 바깥으로 땅을 짚어 엉금엉금 기어서 가다 보면

늪지대,

인질이 되어 내가 나를 순례하는 기분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 진물을 나눠 먹는 것 같습니다
소리 위에 소리가 쌓이고 진물 위에는 새살이 덮이는 방식 속에서 채굴되는 상처

지도 바깥으로 이탈하면 그것은 길이 아닌 걸까
눈 쌓인 새 땅을 밟고 구름 내려앉아 고인 웅덩이를 밟는 것
밟히는 발마다 이리저리 튀고 발밑에 적히지도 않은 숫자를 귀로 밟는다
이미지다 이미지, 노이즈가 앞장선다

귀로 빌어먹는 일은 누군가 흘리고 간 터럭을 줍는 일 만큼 사소하다
그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한 찰나에

앞선 등이 돌았다 나는 새 폭성(爆聲)을 맞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