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에서 나한을 꺼냈다 : 진연주

나한1 나한2

나한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한다. 말들은 부끄럽고 상황은 악화된다. 늙은 개는 매일 제 털을 뽑아낸다. 책을 펼쳐 낱낱의 장에 개의 털을 심는다. 개의 털을 심는 일이 내게는 말을 매장하는 일처럼 여겨진다. 말을 잃는 일은 그처럼 쉽다. 쉽지 않다. 4만 5천 원짜리 시집을 사달라고 조르는 일 만큼이나 쉽지 않다. 시집을 고르면서 앞으로 뻔뻔해질 거라는 다짐을 시험한다. 뻔뻔해졌고, 내 손은 4만 5천 원짜리 시집을 들고 있다. 말들이 비싸다. 하지만 또 싸지. 시집을 들고 서성인다. 여러 날이 흐르고, 너무 갑작스런 제안이긴 한데,로 시작되는 메시지를 읽는다. 갑작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만이 갑작스럽게 여겨진다. 말을 잃은 사람에게는 그 무엇도 갑작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나는 갑작스런 제안을 따라 오백 나한을 보러 갈 것이다. 그리고 나한상 앞에 있다.

일행은 넷. 제주에서도 우린 참 좋았어. 나는 생각하며 기억을 섞어 쓰기로 한다. 시제도 그러할 것이다. 말을 잃은 것만큼이나 시간도 잃어서 흐름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려나. 비가 왔다. 폭우라 부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폭우로 결항이 있었고 결국 출발이 늦었다. 캐리어를 들고 뛴다. 옷이 다 젖은 채로 일터에 도착한다. 제주에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그립다. 그리움은 젖은 것에서 오고 젖어들고 흠씬 젖고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요약하지 못하는, 요약할 수 없는 시간들을, 사람들을 남겨두고 온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앙상해졌다.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 처음부터. 다시 연주를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디제이가 있고 우리의 디제이는 음악을 고른다. 제주에서처럼. 차 안이다. 곧 트로그스와 롤링스톤스와 이글스와 그리고 또… 음악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줄 거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견고한 내부의 벽을 뚫고 시궁창을 지나 울음이 떨어지는 곳을 건너 보풀 속으로, 그러니까 오래된 담요의 보풀 속으로, 건강한 공기 속으로, 어떤 빛나는 빛 속으로, 메아리로 이루어진 풍경 같은 것 속으로. 음악은 좋다. 때로 소음 같지만 대체로는 좋다. 좋은 음악 속에 우리는 있다. 있는 우리가 나한에게로 간다. 떨어져 있던 시간을 다시 붙이고 음악을 나눠 가지며.

제비를 보았지. 제비를 보았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작았다. 작고 작고 작은 것들이 무리지어 날았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박스 같은 것이었으려나. 이를테면 우리는 박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버리지 못하는 박스에 대해. 모아두고 쌓아두고 가둬두는 박스에 대해.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장소. 실재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게 실재하는 장소. 방금 잡은 맥박처럼 퍼덕이고, 자면서조차 웃는 파문 같은 것들의 장소. 사실 이것은 변명이고 박스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병이다. 저장강박증. 병에 걸린 사람들이 병증을 호소하는 시간을 보냈고 그 위로 제비가 날았다. 화강암으로 쌓은 돌담이 야트막하게 길을 낸 곳에서. 흐린 하늘과 소리치는 수평선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박스를 생각하는 일에 골몰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꼽자면 아주 오래된 하얀 밤이다. 거기에는 약간의 슬픔이 깃들어 있는데 말하자면 아버지와 어둠과 달과 눈과 간헐적인 기침 소리 같은 것들이, 이따금씩 슬픔인 것들이 밤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나를 깨운다. 나는 뒤채고 서러워하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한 발은 여전히 졸음을 딛고 있다. 졸음 밖엔 밤새 내린 눈이 있었지. 마당을 하얗게 덮은 눈. 하얀 눈의 마당.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걷는다. 마당이 내는 하얀 자국. 작고 큰 네 개의 하얀 발자국. 아버지와 내가 창조한 세계가 거기에 찍혀 있다. 아직도 거기 있을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실재하는 장소에서 영원히 아름답거나 쓸쓸할 것이다.

다시 나한에게로 가자. 춘천은 안개의 고장이지만 그 날 안개는 없었고… 대신 흐림. 때로 맑음. 하이리빙. 섬유유연제. 어디선가 섬유유연제 냄새가 난 것도 같다. 포슬하고 달큰하고 간혹 더운 냄새. 냄새와 함께 걷는다. 길가에 주차를 하고. 차는 파란색. 회색이 섞인. 맑고 더운 색. 오늘은 탁하고 춥다. 탁한 게 날씨 때문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 모르겠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엔 시간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시기랄까. 시절이랄까. 세기말의 분위기. 세기말이 꼭 이럴 것이라고. 공포조차 살아남지 못할 만큼의 허공 같은 거. 엄청나게 무거운 허공 같은 거. 가라앉음 같은 거. 그럴수록 목숨은 가벼워져서 노력했지 문진 같은 걸로 눌러두자고. 그랬다. 눈두덩에 파란 아이섀도를 바르고 너무 웃어서 멍이 들었다고 말했다. 문진 같은 거였는데, 약간 불완전했지만 속이는 데는 성공해서 멍이 들 때까지 너, 그리고 나는 웃었다. 좋은 기억들을 꺼내며 종일 웃었다. 미세먼지 같은 날 가운데는 하늘이 유독 높아 보이는 날도 있는 것이라고 바른생활 책 같은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박스 속이었겠지. 지평선처럼 낡은.

박물관도 아름다울 자격이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저 건물인, 건물일 뿐인 박물관으로 들어서며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말했다. 박스 같은 곳으로 들어서며 우리는 말했다. 내가 모아두고 쌓아두고 가둬둔 박스가 더 아름다운데, 보잘 것 없지만 더 다루기 힘들고, 그래서 잃어버린 말 같으니까, 우리에게는 말고 나에게만 말하며, 그리고 또 몇 가지 농담에 실패하며 나는 일행을 따라 걸었다.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올라 복도를. 곧 어두컴컴한 입구에 당도했다. 불구의 동굴 같은 그곳에. 오래되고 순수한 돌덩이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나는 때마침 “그리고 선사들이 이른 것처럼 텅 비고 굉장하리라”는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떠올렸다. 너무 굉장하게 여겨져서 자꾸 눈이 간지러웠다. 나는 눈두덩을 두어 번 문지르고 두 발에 힘을 주었다. 어쨌거나, 나는 곧 나한에게 도착할 것이다. 여전히 도착하지 못한 채로 도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