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듣는 일 : 김효나

 

파괴하라고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말을 한다기보다 그녀는 말을, 떨어뜨린다. 아주 자그마한 말의 조각을 띄엄… 띄엄… 떨어뜨린다. 아주 천천히, 잊을 만하면 떨어지는 말과 말 사이 깊은 침묵 속에서 나는 그것을 줍는다. 허리를 굽혀, 그 자그맣고 연약한 말의 조각을 향해 팔을 뻗는다. 조각은 너무 작아 잘 잡히지 않는다. 또한 잘못 건들면 그만 바스러져 버리기에 온 주의를 기울여 주워야 한다. 나는 굽힌 허리를 한 번 더 굽히다, 아예 쪼그려 앉는다. 바닥을 향해 머리를 숙이기 때문에 얼굴 양쪽으로 긴 머리칼의 커튼이 드리워진다. 주위가 어둑해진다. 이미 고요했지만 한 번 더 고요해진 작은 공간 속에서는 내 숨소리가 들린다. 물속에 들어갔을 때처럼 색… 색… 숨소리가 고막에 가득 찬다. 규칙적인 리듬으로 천천히, 그리고 쉼 없이 반복되는 들숨과 날숨 속에서 나는 떨어진 조각을 바라본다. 더럽고 차가운 바닥에 떨어진, 내 숨처럼 자그마한 조각을 바라본다. 고요 속에서 숨소리가 빛나듯, 어둠 속에서 그것은 빛나고 있다. 밤의 공원을 걷자면 드문드문 눈에 띄는 토끼풀꽃처럼 엷은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엷게 빛나는 조각은 하나가 아니다. 약간 고개를 들어 시야를 넓히자, 둘, 셋… 다섯… 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더러운 바닥에는 이미 많은 조각이 떨어져 있고, 나는 문득 울고 싶어진다. 왜? 모른다. 바닥에 떨어진, 언제라도 밟히고 뭉개지고 으깨질 수 있는 것들을 보면 언젠가부터 나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이게 뭐지
난 몰라생각 안 나.
(침묵)
아아, 내가 자른 거지.
내가 세모 모양으로 잘랐어.
?
글쎄생각 안 나. 난 몰라.

나도 모르는, 울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며 띄엄… 띄엄… 떨어지는 말의 조각을 줍는다. 그녀가 자른 조각은 세 모서리가 뾰족하지만, 그녀가 떨어뜨리는 말의 조각은 모서리랄 게 없이 뭉툭하고, 부옇다. 깊은 침묵 속에서 가까스로 떠오르는 말들이기에, 음성은 부들부들 떨리고 발음은 불분명하다. 그녀의 침묵은 깊고, 그리고 길었다. 60년.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녀는 거의 말하지 않았고, 거의 누구도 말 걸지 않았다. 또는 누군가 말 걸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말하는 법을 배우지를 못해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지 몰라.
생각 안 나.
어떻게 말해야 하지?

말이 뭐지?
말을 잘 하면 설명을 하겠는데
말을 하긴 하는데 떨리면서 말해.

그녀의 음성이 지속적으로 떨리는 이유는 그녀의 입술이 한시도 떨림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할 때마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은 요동친다. 무척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법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또 말하는 것을 기억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언어는 온데간데없이 흩어져버리고 떨림 그 자체만 남은, 그녀의 떨림과 떨림 사이에는 또한 깊은 망각이 있다.


그게 뭐지

동그란
동그란 모양을 한
동그라미, 아아, 그래,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만들려고 했어.
세모 조각을 연결해서 동그라미를 만들려고
? 글쎄, 그냥이쁘니까.
동그란동그라미가 이쁘니까 그 뭐더라
다른 사람들이 먹은 걸 주워다가
먹고 버린 껍질
그래, 과자 껍질이나 우유 껍질 그런 걸 주워다가 잘라서
그런데 자꾸만 떨어져.
붙여도 붙여도 자꾸우르르
여기도 떨어져 있네
저기도.
주워도 주워도 끝이 없네.

나는 그녀가 떨어뜨리는 말의 조각을 줍고,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세모 조각을 줍는다. 세모 조각 역시 너무 작아 잘 잡히지 않기에 그녀는 굽힌 허리를 한 번 더 굽히다 아예 쪼그려 앉고, 바닥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인다. 그녀의 머리는 소년처럼 짧기에 긴 머리칼의 커튼은 드리워지지 않고, 대신 직전의 떨림이 잦아든 고요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다. 그녀는 세모 조각을 연결해 동그라미를 만들 때처럼 고요하고 집중된 얼굴로 자신의 발치, 또는 등 뒤, 또는 방의 저 구석에 떨어진 조각을 주워나간다. 방. 그렇다. 이곳은 그녀가 머무는 방이다. 그녀가 버려진 껍질을 끝없이 자르고, 그 조각들로 끝없이 동그라미를 만드는 방이다. 완성한 동그라미들은 고동색 장롱에 넣어둔다. 자그마한 방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두 칸의 장롱 중 하나의 칸에. 반쯤 문이 열린, 그 사이로 내부가 얼핏 들여다보이는 그 칸에는 그녀가 지난 수년간 만들어온 동그라미 수백 장이 쌓여있고, 또한 그녀가 가진 모든 짐이 들어있다. 육십 평생의 그녀에게 남은 모든 짐이, 그녀가 좋아하는 황금색 보자기에 둥그렇게 싸여 있는데 언뜻 봐도 보따리는 동그라미 더미에 비해 작고 빈약하다. 한편, 장롱의 옆 칸에는 함께 지내는 룸메이트의 칠십 평생의 짐이 들어있다. 룸메이트는 미순 언니다. 그녀는 불현듯 미순 언니를 떠올린다. 갑자기 손놀림이 빨라진다.

빨리 다 주워야 하는데,
미순 언니 들어오기 전에 빨리,
미순 언니 들어오면 또 뭐라 할 텐데
이게 다 뭐냐고,
이게 뭔데 자꾸만 이런 걸 자르냐고,

이런 거 왜 자꾸 잘게 잘라 붙이냐고, 쓸데없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왜 이런 걸 하냐고, 이거 해서 뭐 하려고? ? 말해 봐! 다른 사람들이랑 테레비도 안보고 단체 활동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이거 해서 뭐 하려고? 이걸 하면 쌀이 나와 돈이 나와? 십 원 한 푼 되지도 않는 일을 왜 계속 해? 선생님들도 말리는 걸 왜? 이거 때매 병도 더 깊어지고 건강도 해친다는데, 그런데도 새벽에 식탁 밑에 숨어서 왜 이런 걸 하는데? ? 이게 뭔데? 말 좀 해보라니까! 이게 대체 뭐야? 대체 왜 이런 걸 만들어?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그녀의 말을 줍던 나 역시 질려버린다. 깊은 침묵 속에서, 그리고 망각 속에서 느린 속도로 떨어지던 자그마한 말들은 갑자기 커다랗고 무서운 우박이 되어 우르르 쏟아졌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미순 언니가 갑자기 두려워지고, 그녀를 도와 세모 조각을 주워야 할까 망설인다. 망설이지 않는다. 주워야 할 것 같다. 줍지 않으면 당장 미순 언니가 들이닥쳐 무섭고 커다란 말들은 몇 배로 세차게 쏟아지고, 가까스로 떨어지던 그녀의 작고 연약한 말들은 사라질 것 같다. 띄엄… 띄엄… 떨어지던, 왠지 헨젤과 그레텔의 빵 조각처럼 여겨지는 그녀의 말 조각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그녀는 집으로 가는 길을 영영 잃을 것 같다. 그녀가 영영 길을 잃을 것 같다는 불안으로, 나는 문득 정신을 잃을 것 같다. 왜? 모른다. 길 잃은, 어디로도 닿지 못한 채 사방이 뚫린 길 위를 하염없이 떠도는 존재들을 보면 언젠가부터 나는 불쑥 불안해졌다. 그들의 불안과 상관없이, 또는 그들의 불안보다 몇 배로 불안해져 당장 무슨 행동이든 취해야 했다. 하여 당장, 눈에 들어오는 세모 조각을 향해 팔을 뻗는데,

, ,

예상치 못했던 소리가 들린다. 아니, 예상치 못했던 소리 몇 조각이 떨어진다. 당황하여 고개를 들자, 놀랍게도 그녀는 웃고 있다. 소년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만드느냐고?
그냥, 심심하니까.

그리고 다시 떨어지는 웃음 조각. 나는 일종의 충격을 받는다. 그녀에게 웃음이 가능한지 알지 못했기에. 이렇게나 가볍고, 장난스러운 웃음 조각이 지금 이 순간 가능하리라고는.

심심하니까 만들지, 심심하니까
그냥 동그란
그 뭐더라, 동그란동그라미를 만들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무서운 생각도 안 나고
무서운 소리도 안 들리고
하루에 한 장은 못해,
며칠 지나야 한꺼번에 두세 장 나오고 그래.
이걸 해야 되겠다, 하고 한 가지만 잡으면 성공을 못해서,
다른 그림도 그려보다가 바느질도 해보다가
그러다 보면 물방울도 묻고 지저분한 것도 묻고
그러면 또 내버려버리고 그러다 다시 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녀의 말은 띄엄… 띄엄… 원래의 속도로 떨어지고, 나 역시 무슨 불안이 있었냐는 듯 색… 색… 반복되는 고요한 호흡 속에서 그녀의 말을 줍는다. 그녀가 동그라미를 만들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나도 그녀의 말을 줍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녀의 말은 내게 이유와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불안을 주지만, 또한 깊은 평온을 준다.

?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그리고 그녀의 망각.

그녀의 깊은 망각은 내게도 깊은 망각을 준다. 그녀의 망각 속에서 나도 망각한다. 실은 이유와 근원을 알고 있는 슬픔과 불안, 그 슬픔과 불안의 기억을 깊이 망각한다. 우리는 함께 망각한다.

아아, 동그라미.
동그란 동그라미.
동그란 거는 영성체야.
영성체는 예수님의 몸이야.
예수님의 몸은 변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동그라미를 만들면 다 영성체라고 해.
모양이 좀 네모내지고 부끄러우면 영성체라고 안 해.

깊은 망각의 바다 위에 작고 또렷한 배 한 조각이 떠오른다. ‘영성체’라는 이름의 배다. 부들부들 떨리는 흐릿한 말의 조각들 사이에서 ‘영성체’라는 조각은 유독 또렷하고, 날렵하다. 그녀는 단 한 번의 더듬거림도 없이 분명하게 ‘영성체’라고 발음하고, 나는 유독 보석처럼 빛나는 ‘영성체’를 바라본다. 문득 질문이 떠오른다. 그녀가 만드는 동그라미가 영성체라면, 즉 예수의 몸이라면, 그렇다면 그 몸을 이루는 작은 조각들은 그의 살점인가?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당신이 줍고 있는 세모 조각들은 예수의 살점인가요? 그래서 그렇게 소중하게 줍나요?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니, 그녀 주위에 질문 조각을 떨어뜨린다. 자신의 발치에 툭, 떨어진 조각을 그녀는 낯선 눈으로 바라본다. 한없이 낯선… 그리고 어디론가 멀어지는… 끝없이 아득해지는 눈으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연다.

누가 와서 뭘 물어보면
말하지를 못해.
말하는 걸 배우지를 못해서
선생님한테 배운 적이 없어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난 몰라.
어릴 때도 그랬지
사람들이 이거 할래 저거 할래 물어보면 대답을 못했어.
너 학교 다닐래 말래
일할래 말래
엄마 따라올래 남아 있을래

집으로… 그녀는 드디어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은 걸까. 집으로 가는 기억을, 찾는 걸까.

결정을 못 해서
결정은 언제 결정하는 건지 몰라서
결정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서
혀가 굳어버려서
혀가 동굴에 숨어버려서
작고 컴컴한 동굴, 그 속에 숨어 잠들어 버려서
깊이
멀리
잠이 와, 자꾸 잠이 와서
말해야 하는데 자꾸 잠이 들어 버려서

그리고 그녀는 잠이 든다. 서서히, 점점 빠르게. 어느 순간 완전히. 조각을 줍던 자세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 자그마한 방의 한가운데에서 작게 웅크린 채 부동하는 그녀의 몸뚱이 주위에는 그녀가 미처 줍지 못한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그녀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선생님들과 미순 언니의 눈을 피해 자르고 붙였던 작고 연약한 조각들이, 그녀의 작은 몸뚱이 주위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다. 또한 그녀 역시 노랗게 빛나고 있다. 그녀가 머무는 자그마한 방의 또 다른 면에는 자그마한 창이 있고, 그 창을 통해 노란빛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황금빛, 그녀가 좋아하는 바로 그 눈부신 빛이, 반복되는 창살의 그림자와 대조되어 한층 눈이 멀 듯한 빛으로 그녀와 그녀의 조각들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빛으로 물든 채 빛나고 있는 그녀와 그녀의 조각들을 보고 있자니 아까 처음으로 던졌던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대답이 떠오른다. 또는 그녀가, 다시 한 번 예상치 못한 대답을, 예상치는 못했으나 지금 이 순간 가능한 대답을 지금 이 순간 가능한 방식으로 툭, 떨어뜨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황금빛이 절정에 달하고, 빠르게 어둠이 다가온다.

어둠이 다가오는 소리에 그녀가 잠에서 깨,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윽고 자신의 주변에 흩어진 조각들을 발견한 그녀, 낯선… 또다시 어디론가 한없이 멀어지는 눈으로… 동시에 어딘가로 점차 다가가는 눈으로 천천히 입을 연다.

이게 뭐지
난 몰라생각 안 나.
(침묵)
아아, 내가 자른 거지.
내가 세모 모양으로 잘랐어.
?

001002003

윤미애의 <영성체> 작업, c. 윤미애; 밝은방 https://brightworkroom.modoo.at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제목 <파괴하라고 그녀는 말한다>에서 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