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몽드』 지가 본 오늘의 한국문학: “한국은 정령들을 간직하고 있다” / 플로랑스 누아빌 / 윤경희 역

∎ 일러두기

2016년도 프랑스 ‘파리도서전(3월 17일~20일)’에 즈음해, 『르 몽드(Le Monde)』 지가 도서전 주빈국으로 초대된 한국의 문학 현황을 개관하는 기사를 실어 이 자리에 소개한다. 이 기사는 『르 몽드』가 금요일마다 별면 특집으로 간행하는 ‘책들의 세계’ 2016년 3월 18일자 판의 6~7면 ‘자료(Dossier)’ 란에 게재됐다.
자신들 나름의 관점으로 작성된 이 기사의 문맥이 얼마나 올바르게 한국문학의 전체적 현황을 파악하고 세계에 알리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한편으로 들지만, 유럽의 한 권위 있는 언론이 한국문학을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지에 관한 역-정보의 본보기는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한국을 직접 방문해 이 기사를 작성한 플로랑스 누아빌(Florence Noivllle)은 『르 몽드』의 해외문학 담당 편집자로서 오랫동안 해외 유명 작가와의 인터뷰 기사를 써왔고, 그 자신 또한 소설가이자 아동문학가, 전기집필가로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 문학계의 유명 인사이다.
한편, 이 기사를 번역해준,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인 윤경희 씨에게 각별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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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언하자면, 이 기사에는 본 문학실험실의 대표인 소설가 이인성의 인터뷰 내용이 실리며 ‘문학실험실’에 대한 소개까지 이루어져 사소한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다.

∎ 기사 전문 번역

한국은 정령(精靈)들을 간직하고 있다

“네? 김금화를 보러 간다고요? 김금화가 한국의 무속인 중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것 아세요? 최고로 권위 있어요. 인간문화재고요…” 서울 북동부의 이문동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내 젊은 통역자는 우리가 이 ‘무당’을 인터뷰하러 간다는 데 놀라서 어쩔 줄 몰랐다. 김금화가 자기 나라에서 심지어 해외에서도 스타라는 것은 사실이다. 2015년 ‘테아트르 드 라 빌(Théâtre de la Ville)’은 그녀를 초청해 굿판을 벌였다. 굿이란 노래, 음악, 춤을 혼합해 고통을 위무하는 제의이다.

신을 벗고, 좁다란 계단을 올라갔다. 이런저런 도구들로 가득 찬 방에 들어가, 가는귀가 먹은 나이 든 부인을 마주하고 방바닥에 앉아, 우리가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왔다고 설명했다. 김금화는 즉각 이해했다. 한국[남한]에서 문학과 샤머니즘은 긴밀한 연관이 있다. 영혼의 심연으로 내려가, 사람(인물)들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모든 것을 말로 옮기기. 어떤 점에서 작가와 무당은 같은 일에 몰두한다.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저에게 자기들에 대해, 그들을 짓누르는 과거의 무게에 대해, 또는 숨겨진 진실에 대해 말해달라고 할 때, 저는 점쟁이이기도 하고, 심리 치료사이기도 하고, 이야기꾼이기도 하지요.” 김금화는 즐거워한다. “저는 그들에게 아무도 가지 않은 고독의 길을 앞장서 가라고 권합니다.”

김금화는 회고록[주1]을 쓰기도 했는데, 사랑, 고통, 광기의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그것은 어떤 작가라도 꿈꾸어보았을 만한 소재일 것이다. 게다가 샤머니즘은 한국문학 자체에 배어들어 있기도 하다. 판소리의 시대가 그 경우다. 판소리는 전통 창가로써, 수세기를 지나서도 무수한 동시대 작가들에 의해 계속 원용되고 재창작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삼성과 현대로 알려진 초현대적 국가에서 우리가 ‘비이성적’이라 부르는 것이 이처럼 활달하게 유지된다. 고은이나 황석영 같은 노벨상 유력 작가들에게서도, 죽은 자들의 영혼은 산 자들 주위를 떠돌며 상상계에 기거하고, 역사는 혼령들로 붐비고, 좋든 나쁘든 그것들은 인간사와 상호작용한다…

특이한 생동감을 위해서인가? 민속적인 것인가?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런 것만은 아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아슈케나지 문학(“우리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고 아이작 싱어는 말했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판타지나 랭보(“나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견자가 되기 위해 애씁니다”라고 할 때의 그)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떻든 서양 역시 문학과 비의적인 것의 혼인을 경축해오긴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공생은 다른 곳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훨씬 더 정상적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이 나라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어나는 것이 많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번역가 최미경과 장-노엘 쥐테는 설명한다. “번역할 때 우리는 항상 다소간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면면들이 서구인들의 웃음을 자아낼까 봐서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고, 그것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문학에서는 그렇지요. 문학에서, 그리고 삶에서도요.”

활력 있고 강인하게, 한국에서 인간의 삶과 문학은 불교, 유교, 그리고 물질주의까지도 넘어 생명을 이어왔는데, 이러한 믿음은 특히 자연의 힘에 대한 매혹이나 무생물계에 특별하게 기울이는 주의력과 짝을 이룬다. 한국에서 나무는 신령하고, 물은 축성되고, 모든 사물의 뒤에는 그것의 주인의 영혼이 숨어 있다… 이 점은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주2]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 난지도에서 거둔 수숫대 빗자루나 물소 뼈 단추에 장례를 지내준다.

세계를 이런 식으로 읽어내는 데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작가들도 그것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뛰어낸 재능을 지닌 이승우의 경우가 그렇다. 『식물들의 사생활』[주3]의 작가는 카뮈,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를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해서, 자신이 “가장 유럽적이기를, 또는 모든 한국인들 중에서 가장 한국적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물은 그의 최근 소설 『욕조가 놓인 방』[주4]의 핵심에 있다. 모태로든 위협으로든 물은 도처에 존재한다. 면도기나 액자 같은 사물[대상]들은 화자의 사랑 이야기를 조형해내려는 듯하다.  식당에서 도토리묵 접시를 앞에 두고 이승우는 다음과 같이 시인한다. “맞습니다. 소설 초반부에서 인물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그것들이지요. 사물들이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대작가인 이인성은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우리는 『쓺』이라는 제호의 품위 있는 문예지를 발간하고 있는 서울의 ‘문학실험실’에서 그를 만났다(이인성에 따르면, ‘쓺’이라는 아이디어는 “대중문화로부터 해방된 문학을 생산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의 제약들을 쓸어버리려는” 데서 나왔다). 『낯선 시간 속으로』[주5]의 저자로 한국의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그는, 우리를 이끌고 있는 문제들로 돌아와, “작가는 손이고, 매개자”라고 단언한다. “말들이 찾아오고, 말들이 다른 말들을 부릅니다. 나는 말들이 어떻게 저 홀로 움직이는지 관찰하지요. 말들은 마치 우리 몸이 이따금 의도하지도 않은 동작을 행하듯이 그러거든요. 나는 그 말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둡니다. 그러면 말들이 우리를 다룹니다.”

한국적 주인공은 따라서 어떤 시스템의 한가운데에서 말과 사물이 연합하여 행사하는 영향력을 겪어낸다. 동물들과 식물들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힘들의 영향력을.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들의 영향력을. 왜냐하면 이인성이 설명하듯, “과거, 현재, 미래가 항상 우리 안에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이승우에 따르면, “이 존재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서로 충돌하고, 자기를 둘러싼 것과 연결되는지 이해하려는 시도”가 나온다. 이 모든 것이 추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반대로, 이인성은 강조한다. “내가 항상 의식해온 점이 있다면, 그것은 관념들―이따금 서양 문학에서 감지되며 그것의 차이점을 만들어내는, 세계를 바라보는 비[초]육체적 방식 말입니다—을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감각들로 대체하려는 나의 욕망이랄까요.”

감각의 문학. 직관의 문학. 이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경향 중의 하나다. 한국 전쟁과 분단 이후(1940년대에 태어난 두 작가 김원일과 조정래의 작품에 그 상처들이 편재해 있다), 1970~1990년대의 문학은 가속화된 산업화의 이면과 사회 문제들, 군사 독재의 폭력에 관심을 기울였다(이문열과 강석경). 반면, 1993년의 민주주의 회복으로 특징지어진 1990~2000년대에는, ‘소비 사회의 문학’(윤대녕, 이순원 등) 및 가부장제의 경직된 도덕을 비판하는 여성 작가 세대(은희경, 김인숙 등)가 등장한다. 이 시기들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최근 이마고 출판사에서 출간한 『20세기 한국 문학 개론』[주6]에서 읽을 수 있듯, 샤머니즘은 특히 독재 시대에는 엄격하게 억압되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사멸된 적이 없다.

그리고 21세기는? 최근의 번역물들로 판단하자면, 가벼운 것은 거의 놓일 자리가 없다. 천명관을 제외하고 말이다. 정통 한방 찻집에서 만난 천명관은 우리에게 자신은 “웃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고령화 가족』[주7]에서 어머니의 집에 살러 들어온 50대의 세 자식들과 누가 더 망했는지 모를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하며, 천명관은 웃기는 작가가 되는 데 훌륭하게 성공하는데, 여기서 유머는 난장의 탁월한 형식에 가깝다. 인물들은 부유한다.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주8]에서 그랬듯이. 또는 거장 영화감독일 뿐만 아니라(「오아시스」와 「시」) 뛰어난 작가이기도 한 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주9]에서 그랬듯이.

위 소설들의 대다수는 결핍, 실패한 사랑, 훼손된 자연, 무명인들의 삶에서의 미세한 갈등들을 이야기한다… 이는 ‘콜레주 드 프랑스’ 한국학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마르틴 프로스트가 그의 맛깔스러운 책 『한국에서의 생활 풍경』[주10]에서 비애, 우울, 불만, 원한 등이 혼합되었다고 완벽하게 묘사한 심리 상태, 바로 한국적 ‘한(恨)’의 표출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영혼을 해방시키고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자들의 태고로부터의 기술을 작가들뿐만 아니라 화가와 서예가들도 어쩌면 이렇게나 힘 있게 이어나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통역가에게 몸을 돌려 물어보았다. “그런데, 샤머니즘이 효력이 있기는 한가요? 김금화는 38선에서 제사를 집행했다고 들었는데요,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에서, 두 나라의 통일을 위해서요. 평양의 도발과 주변국들의 긴장 고조를 고려해본다면 효과에 한계가 있지는 않은지…” 젊은 통역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중하게,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는 듯. “당신 같은 서양인들은 그 고질적인 합리주의를 고집하는 한 한국 문학에 아무리 관심을 가져도 소용없을 거예요…”

<주석: 프랑스 출판 정보>

1) Kim Keum-hwa, Partager le bonheur, dénouer la rancœur: Récits de la chamane aux dix mille esprits, Imago, 2015. [국내: 『만신 김금화』, 궁리, 2014]
2) Hwang Sok-yong, Toutes les choses de notre vie, Philippe Picquier, 2016. [국내: 문학동네, 2011]
3) Lee Seung-u, La Vie rêvée des plantes, Zulma, 2006. [국내: 문학동네, 2000]
4) Lee Seung-u, La Baignoire, Serge Safran, 2016. [국내: 작가정신, 2006]
5) Yi In-seong, Saisons d’exil, Decrescenzo, 2016. [국내: 문학과지성사, 1983]
6) Yi Nam-ho, Yi Kwang-ho, U Chan-je et Kim Miyion, Introduction à la littérature coréenne du XXe siècle, Imago, 2016.
7) Chon Myong-gwan, Une famille à l’ancienne, Actes Sud, 2016. [국내: 문학동네, 2010]
8) Yi In-seong, Interdit de folie, Imago, 2010. [국내: 문학과지성사, 1995]
9) Lee Chang-dong, Nokcheon, Seuil, 2005. [국내: 문학과지성사, 1992]
10) Martine Prost, Scènes de vie en Corée, L’’Asiathèque,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