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문학실험실 설립취지문

 

본 법인은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문화 환경 속에서 한국문학의 새로운 정체성을 정립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문학 실험을 시도하는 창작 및 비평 활동을 공공의 차원에서 다각적으로 기획·지원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21세기로 진입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문화 환경 속에서, 한국문학은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다. 문화적 패러다임의 대전환과 함께 범세계적인 문화 구조가 총체적으로 해체·재구 성되는 와중에 온갖 문화적 형태들과 존재 방식들이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는바, 문학 또한 과거의 영광을 박탈당하고 그 존립마저 위협받는 위기 상황에 처해진 때문이다. 더욱이, 복합적이며 가변적인 요인들로 뒤얽혀 전개되고 있는 이 위기 상황이 장기지속화의 양상을 띠고 있는 만큼, 그 극복의 과정도 매우 길고 험난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단기적으로는 일종의 응급처방들이 필요하겠지만, 먼 안목으로 보자면 한국문학의 보다 근본적인 체질적 진화가 필요한 것이다.

위와 같은 우리의 현실 인식은 이 시대의 문화 현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관찰과 성찰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이를 위해 20세기 후반기부터 격변해온 문화사적 흐름과 그 속에서 문학의 위상이 드러나는 주요 국면을 일별할 때, 우리는 특히, 1) 문화적 대혁명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디지털 매체의 등장이 출판(문자) 매체의 영역을 급속도로 축소시키면서 문학의 양적 유통부터가 현격히 줄어들었고, 2) 디지털 매체를 타고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정보화 사회’ 체계를 통해 이른바 문화의 ‘세계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각종 대중문화의 지배력이 압도적으로 확산되자 문학은 점차 대중문화의 ‘콘텐츠’를 제공하 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으며, 3) 이에 편승해 문학 내부에서도 대중문학이 주류로 떠오르고 본격문학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 현상들은 두 차원의 심난한 문제를 제출한다. 첫째는 문학의 사회적 실존 방식의 문제로서, 문화의 올바른 세계화를 저해하는 대중문화의 맹목적 팽창이 증거하듯이, 문화의 상업화·산업화가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문학마저 속수무책으로 시장 논리에 침윤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문학의 독자적 자존 방식의 문제로서, 전체적 문화 구도 속의 문학의 위상이 모호해지는 과정에서 대중문학/본격문학 같은 각종 개념들이 흐려지듯 문학의 내적 논리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물론 문학도 일종의 상품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동안의 문학은 상업적 가치를 넘어서는 예술적 가치를 지님으로써 존재 의미를 부여받는 독특한 인간적 활동에 속해 왔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 사이에 상업적 대중문학은 예술적 본격문학을 문학의 현장 밖으로 밀어냈다. 이때 무엇이 문제인지는 분명하다. 상업성은 많이 팔려서 많은 이윤을 창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인즉, 가급적 당대 대중의 쾌락 취향에 영합하려는 경향을 띤다. 반면, 예술성은 대중의 기호와 갈등을 겪을지언정 인간의 삶을 이상적인 높이로 끌어올리려고 심혈을 기울인다. 그렇다면 이 양자 사이의 충돌을 변증법적으로 지향하는 방법은 없을까? 대중과 통하되 대중의 지성적·감성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그래서 대중의 자발적 의식화를 꾀하는 문학의 길은 가능할까?

문학의 상업화 문제를 걷어낸다 하더라도, 더 심층적 차원에서 문학의 자기 재정립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문화 전체의 상업화, 더 나아가 산업화를 추동한 물적 기반으로서의 디지털 문명과 정보화 사회 체계의 근본 속성이 문학의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파기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사실 디지털 문명의 기본 원리 중의 하나는 모든 인류 유산의 관념적 차별성을 지우고 그것들을 단순한 물리적 기호로 환원시켜 무한 재조립을 행하는 데 있다. 그 안에서는 사실, 예술 장르의 차이 따위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문화의 혼종성 혹은 융합이 강조되는 연유도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문학의 독자적 존재 이유는 사라지고 있는 것인가? 문학은 다시금 무엇일 수 있으며 새로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과연 얼마만큼 유용한 것인가?

본 법인의 출범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이런 근본적 물음들 즉 문제의식에 기초해 있다. 이제 이런 문제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는 한, 그 도전을 통해 낡은 껍질을 벗고 자기갱신을 거듭하며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미래지향적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한, 한국문학은 질적 도약도 정당한 의미의 세계화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먼저 그 도전이 과감하고 자유롭게 전개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그 안에서 다양한 창조적 실천과 이론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지원해나가는 데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고립되어 있던 여러 실험적 활동들이 한 공간에 모여 영향을 주고받으며 집단적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작더라도 뜻깊은 문화적 운동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을 제공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문학실험실’이라고 붙여진 본 법인의 명칭은 이 도전적 사업에 임하는 우리의 기본 자세를 반영한다. 도전이 곧 미지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실험적 탐색을 일컫는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치열한 실험정신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이 사업의 수행에 요구된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의 의도는 현실적 체감으로 다가오는 매우 구체적인 기획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실제적 사업들은 크게 보아 창작의 층위, 이론적 연구와 비평의 층위, 독자와의 소통의 층위로 나뉜다.

1-1 창작의 층위에서는 우선, 본 법인의 공익 사업적 의도를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동시에 문학적 실험을 대표하는 작가들에 대한 평가와 부각을 주목적으로 삼는 분명한 개성의 문학상으로 ‘김현문학패(文學牌)’를 제정·시행하려 한다. 마침 올해로 타계 25주기를 맞는 고(故) 김현은 비평가로서는 드물게 한국문학사에 독보적 족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강한 정신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불후의 인물로, 특히 젊은 시인·소설가들의 실험정신을 일관되게 옹호했던 면모를 되새길 때, 본 법인의 지향점과 일치하는 바가 큰 까닭이다. 그를 기리며 그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이 문학상은 우선 시·소설 두 개 부문을 대상으로 삼아, 수상자들에게는 그간의 활동을 다소나마 보상하고 새로운 의욕을 북돋우는 창작지원금 을 지급할 것이다.

1-2 그 연장선에서 우리는 문학적 실험의 영역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올렸으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는 작가들과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지만 등단조차 막막한 신인 등, 실험적 작가들의 발굴과 지원에 힘을 기울일 것이다. 상업주의에 오염되어 유행을 쫓는 것이 대세인 이즈음의 문학 풍토 속에서 자기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투하는 작가들, 또 새로운 자기의 길을 개척하고자 시도하는 문학 지망생들이 계속 소외되는 현상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 작가로서의 생존을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자기 책의 출판과 독자들의 반응 및 비평적 관심이라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조건이 충족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코자 한다. 새로이 추천할 만한 신작은 물론, 절판되었으나 가치 있는 작품의 재출간을 지원하고 독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비평도 의뢰하여 발표될 수 있도록 조처할 것이다.

1-3 더 나아가 외롭게 흩어져 있는 이 작가들이 힘을 합쳐 한국의 문학 사회 안에서 하나의 ‘에콜’을 형성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방안을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연구하고 시행할 예정이다. 그 전에, 주로 시 분야에 존재하는 기존 동인 활동들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작품 낭독회나 다른 예술 장르와 결합된 텍스트 실험적 퍼포먼스 등을 지원하는 한편, 작가들끼리의 토론과 작품 독회 등을 통해 그들을 결집시키고 창작의 내실화를 다지게 하는 정례적 집담회의 개최 등을 준비하고 있는 것도 종국적으로는 그 때문이다.

2-1 이론적 연구와 비평의 층위에서 첫 번째로 시행할 사업은, 우선 그런 활동의 거점이 될 비평 중심의 반(半)연간 문학전문지 『문학의 이름으로』(가칭)를 간행하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계간 문학 전문지의 등장이 한국문학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의 문학지들은 변화된 문학계 풍토 속에서 서서히 대형 출판사들의 홍보물로 전락해 갔고 많은 비평가들은 현재 그 들러리 역할에 머물러 있다. 비평 영역에서 지금 긴급히 필요한 것은 상업적 이익 추구 집단들로부터 독립된, 그래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국문학의 전체적 흐름을 통찰하고 지금 문제 삼아야 할 진정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가치 있는 작품들이 무엇인지를 가려 그 의미를 캐내는 일련의 작업이다. 우리 문학지는 주제별 특집과 작품 분석을 주된 기조로 하여 그 임무를 수행코자 한다.

2-2 이와 연계해서도 문학 연구자들과 비평가들의 뜻을 집중시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면, 이들의 활동을 조직화시키는 작업이 동시에 요청된다. 여기엔, 자료 정리를 위한 기초적 작업을 비롯하여 하나의 주제나 작가를 대상으로 한 탐구 등에 관한 작은 단위의 연구 모임부터, 각각의 전문 분야를 넘어 타 분야와의 교류를 도모하는 확대된 융합적 연구 모임까지, 다양한 연구 조직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구체적 활동 지원은 본 법인의 기획에 의해 주도될 수도 있고 공모의 형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결과물들이 포럼의 형식으로 발표되고 토론의 대상이 되어, 보다 심화되고 확장된 다음 단계의 논의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가려 한다. 우리는 장차 이런 활동이 국제적인 교류로까지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2-3 비평의 근본 목적의 하나는 작가와 독자, 창작과 독서를 매개하는 것이다. 실상 어떤 작품의 의미를 대중에게 올바르게 전파하면서 독자의 독서 능력을 질적으로 높이는 것은 주로 비평가의 몫이다. 따라서 비평가의 작업들이 일반 독자에게 잘 전달되는 회로를 만드는 것 역시 우리가 행해야 할 매우 긴요한 임무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 비평 총서의 출간을 구상하고 있다. 또한 비평가의 대중 강연회라던가 비평가가 직접 작가를 대동하고 독자들과 대화하는 만남의 자리도 계획하고 있다.

3-1 독자와의 소통의 층위에서 이루어질 사업의 상당 부분은 다른 층위의 사업과 겹쳐지므로 그것들을 밝히는 과정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작품 낭독회나 퍼포먼스를 통한 작가와 독자의 만남, 강연회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비평가와 독자의 만남, 대중 계몽적 비평 총서의 발간, 독자의 관심을 고급화시키기 위한 주제 중심적 정기간행물의 발간 등은 모두 독자와의 소통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3-2 그런 수준의 소통을 한 단계 더 드높이기 위해, 본 법인의 기반이 보다 튼실해진 이후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장기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사업 중의 하나는 체계화된 문학 소통 프로그램의 개발과 개설이다. 우리는, 다른 많은 분야나 마찬가지로 문학 분야에서도, 현금의 모순을 야기한 가장 큰 원인의 하나가 문학교육의 실패에 있다고 본다. 지금 한국문학의 미래를 위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개선점은 일반 대중의 문학적 소양을 질적으로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창작의 수준은 대개 독자의 수준과 나란히 가기 때문에, 그런 기반이 확립되지 않는 한 한국문학 자체의 질적 상승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판단 하에, 우리는 그간 혹독한 현실을 겪어온 전문 문학인들의 체험을 발판으로 일반적인 문학 인식과 독서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심도 깊은 대중 강좌 시스템을 차분히 연구해나갈 예정이다.

이상으로 표명한 우리의 사업안이 한국문학의 체질을 바꾸고 세계문학 속에서의 위상을 격상시킬 수 있는 올바른 진화에 기여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기원하며, 우리 약속이 흐트러지 지 않을 혼신의 노력을 거듭 다짐한다.

-이 설립취지문은 2015년 4월 8일 본 법인의 발기인 총회에서 채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