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닿지 못한 섬에서 : 김숨

불빛들은 손에 닿을 듯 가깝다. 막배는 벌써 떠났고 불빛들이 점점이 떠 있는 곳에 닿으려면 날이 밝고 첫 배가 뜨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첫 배는 뜨지 않을 수도 있다. 첫 배가 뜨지 않으면 그다음 배도 뜨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그럼 막배도 뜨지 않을 것이다. 어둔 남색 바다는 무표정하지만 언제 느닷없이 표정을 바꿀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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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밀려가고 밀려온다. 그러면서 섬은 그곳에 있고 그곳에 없다. 나는 섬과 함께 그곳에 있고 그곳에 없다.

요즘 나는 섬 주민들 얼굴들이 달려져 보이는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다. 야생의 바위 같던, 그래서 광물 덩이를 관찰하듯 물끄러미 들여다보게 되던 얼굴들이 부드러워지고 둥그레지며 표정과 온기가 깃드는 경험이다.

오늘 낮에 마을을 산책하다 만난, 지붕이 낮은 집 뒷마당 텃밭에 배추씨를 심고 있던 해녀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감자처럼 작은 얼굴에 진 모든 주름을 총동원해 웃는 할머니를 돌담 너머로 바라보며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예쁘다, 예쁘다, 너무나 예쁜 얼굴을 날 바라보며 웃고 있구나!’ 할머니는 젊은 날(육지에 살고 있는 할머니의 자식들이 아직 아이였을 때) 바닷속에서 창살로 돔이나 볼락을 잡던 때로 돌아가 그 시범을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할머니의 몸집은 자그마하다. 젊은 시절에도 자그마했을 저 몸으로 어떻게 쉼 없이 흔들리는 거대한 바다를 견디며 창살을 던져 물고기를 잡았을까. 그녀는 이 섬에서 남쪽으로 5.6킬로미터 떨어진, 이 섬보다 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이 섬은 한 바퀴를 도는 데 한 시간 삼십 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는다).

며칠 전에는 해녀 할머니들이 붉은 무씨를 나눠 갖는 모습을 구경했다. 완전한 한 세계인 무씨 한 알, 한 알이 이 섬과 닮았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그렇담 이 섬도 무씨와 마찬가지고 완전한 하나의 세계일까?

나는 이 섬 주민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어떻게 섬에 들었고 어떻게 섬에 정착했으며 어떻게 자손을 불렸는지’ ‘원망하며 떠났던 섬에 왜 다시 돌아왔는지’ ‘어느 날 바다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해녀 어머니’에 대해 듣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섬에는 2백 명 내외의 사람이 살고 있지만 처음에 무인도였다(1751년에 소를 이 섬에 방목하면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 소를 키우고, 집을 짓고, 보리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실 물이 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이 섬에 생겨난 마음들(이기심, 기쁨, 분노 등등), 선과 악, 법, 결혼과 장례 같은 의식, 상부상조와 다툼들…… 나는 그러한 것에 관심이 있다.

지척이지만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떠 있는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애타 하며 바라보는 심정이다. 가깝고 먼 저 과거에 내 모든 것이 있다. 내 집, 내 친구들, 내 강아지들…… 내 의지로는 그러니까 내 두 발로 걸어서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표면 위를 반딧불처럼 떠다니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심장이 녹는 것 같은 슬픔에 신음하는 나…… 나는 누굴까? 나는 왜 섬 속의 섬에 들어와 있는 걸까? 나는 내 의지로 이곳까지 온 걸까? 그렇담 무엇이 날 이곳으로 이끈 걸까? 깊은 밤 밤하늘에서 소리 없이 떨어진 운석처럼 어쩌다 이 섬에 떨어진 것만 같다. 이 섬에 들기 한 달여 전까지도 나는 이 섬의 지명조차 몰랐다. 나는 섬에서의 나날을 계획한 적이 없다.

내가 들어와 있는 섬은 (섬에 딸린) 섬 속의 섬이다. 이 섬 주민들에게 바다 너머 큰 섬은 육지나 마찬가지다. 섬 주민들은 배를 타고 큰 섬에 나가 생필품을 사고 옷을 사 입고 약을 짓는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큰 섬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려 섬을 떠난다. 떠난 아이들은 큰 섬에서 어른으로 자라 육지로 나가 육지 사람이 되거나, 큰 섬에서 자리 잡고 살아간다.

내일 배가 뜰까? 내일 파도가 높아 배가 뜨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들었다. 섬 주민들은 육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스마트폰으로 날씨와 파도의 높이를 체크하고, 바다 너머 세상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해 듣지만 파도가 높아서, 태풍이 올라와서, 안개가 성벽처럼 섬을 포위해서 배가 뜨지 않으면 사나흘 꼼짝없이 섬이 갇힌다.

지난 초봄 이 섬에 들며 내가 가장 기대한 것은 바람이었다. 어디서도 맞아보지 못한 강력히 휘몰아치는 바람에 날 놓아두고 싶었다. 섬에는 거대한 고독이 있어서 그 고독에 질식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섬의 바람은 내 기대를 한껏 충족시켜줬다. 나는 바람에 나는 깎이고 깎여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에 도달하는 것 같은 황홀을 맞보았다. 내가 종종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의 한가운데서 버티고 서 있곤 하는 들판 옆에는 무덤들이 모여 있다. 돌을 쌓아 울타리를 두른 무덤들 주변에는 철사처럼 가늘고 기다란 줄기에 매달린 보라색 꽃들이 무더기무더기 자라 있다. 새끼손톱만 한 꽃들은 마치 죽어서도 이 섬을 떠나지 못한 영혼들 같다. 바람 속에서 나는 윌리엄 터너와 그가 남긴 그림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는 폭풍 속에서 나무에 자신을 묶어두고 바람과 대기를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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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독…… 섬의 고독은 거대해서 나는 (아직 고독에 이르지 못한, 고독에 가 닿으려 몸부림치던) 나의 외로움을 그만 망각하고 말았다.

내일 나는 섬을 한 바퀴 돌아, 섬 남동쪽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를 찾아갈 것이다. 그녀는 이 섬에서 태어나 이 섬에서 일생을 살았다. 그녀도 해녀지만 너무 나이가 들어 물질을 다니지 않는다. 어부이던 남편이 일찍 병으로 세상을 뜨고 아들과 딸도 오래전 육지로 떠나, 그녀는 혼자 점점 납작해지고 찌그러져 가는 집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그녀는 얼굴도, 목소리도 희미해서 이 섬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주민이지만 날 가장 강력하게 끌어당긴다.

*

섬을 떠나온 지 두 해가 지났다. 나는 몇 번째 배를 타고 그 섬을 떠나왔던가. 첫 배였던가, 두 번째 배였던가.

그녀는 그 섬에 살고 있을까. 내가 그 섬에 다시 찾는다면 그녀가 그리워서다. 언젠가 내가 그 섬을 다시 찾았을 때 그녀가 부디 그 섬에서 여전히 살고 있기를…… 나는 아직 그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