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언어 탐구 行 – 성주 청송 : 윤해서

성주_문학콘서트

미지

한 번도 감정에 휘말린 적 없는 벽은 평평하고 반듯하다
말이 사라져 두려움도 불행도 없는 곳에서

나, 열쇠에, 떨어진다, 선로를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네가 외면한 것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네가 보려고 하는 것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그렇다

어떤 일에 막히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라는 문장을 되뇌곤 한다

토끼가 앞니를 갈기 때문에
토끼의 앞니는 끊임없이 자라지만

사라진 골목을 짖어대는 개들

수상한 이불을 덮어본 적 있나요
서울에서 부산은 전혀 멀지 않아요

먼 곳에서 음악이 흘러들어와 카펫처럼 깔리는 기분이었다

긴 밤이 끝났으니 인제 그만, 눈 뜰 시간이다

나는 무해한 짐승처럼 웃었다
나는 더는 나를 쓰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를 지우고 너를 쓰기도 전에 내가 나에게서 사라지고 있다

이름도 없이 당신은

잠들지 말았어야 했다

한 번도 감정에 휘말린 적 없는 벽은 평평하고 반듯하다는 이향 시인의 문장이다. 말이 사라져 두려움도 불행도 없는 곳에서는 진연주 소설가의 문장이다. 나, 열쇠에, 떨어진다, 선로를은 한유주 소설가의 문장이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네가 외면한 것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네가 보려고 하는 것은 최규승 시인의 문장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그렇다는 김선재 소설가의 문장이다. 어떤 일에 막히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문장을 되뇌곤 한다는 백가흠 소설가의 문장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인성 소설가의 문장이다. 토끼가 앞니를 갈기 때문에 토끼의 앞니는 끊임없이 자라지만,만이 내 문장이다. 사라진 골목을 짖어대는 개들은 이향 시인의 문장이다. 수상한 이불을 덮어본 적 있나요와 서울에서 부산은 전혀 멀지 않아요는 김대중 가수의 문장이다. 먼 곳에서 음악이 흘러들어와 카펫처럼 깔리는 기분이었다는 진연주 소설가의 문장이다. 긴 밤이 끝났으니 인제 그만, 눈뜰 시간이다는 김선재 시인의 문장이다. 나는 무해한 짐승처럼 웃었다와 나는 더는 나를 쓰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를 지우고 너를 쓰기도 전에 내가 나에게서 사라지고 있다는 한유주 소설가의 문장이다. 이름도 없이 당신은은 최규승 시인의 문장이다. 잠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최하연 시인의 문장이다. 김선재 소설가와 김선재 시인은 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미지는 모두 열 명의 미지다.

언어

8월 30일 아침 9시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가 도착한다. 버스의 문이 열린다. 사람들 셋이 타고, 마지막으로 내가 오른발을 버스에 올려놓는다. 버스는 곧 출발한다. 30분 뒤에 나는 버스에서 내려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나는 빠르게 걷고 있지만 모두 나보다 빠르다. 나는 8월 30일 아침 9시 30분을 상대적으로 느리게 통과한다. 나의 언어는. 영혼은 거부하는 힘이다. 영혼은 거부다. 거부는 존엄이다. 알랭의 문장들을 떠올린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들이다. 영혼, 거부. 거부하는 영혼. 더 정확하지 않게 만든다. 사랑은 공포를 낳는다. 사랑의 희열은 공포의 테두리에 매달린다. 공포는 분노를 야기한다. 분노는 파괴를 부른다. 이것은 파괴된 문장들이다. 사랑, 필연적 공포. 어제 필연이라는 단어는 읽은 적이 없다. 딸기. 즐거움. 수다. 절대적 신뢰, 우정. 운명. 영원함. 가치. 가치는 용기다. 용기는 가치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들. 나의 언어는 아직 29일 오전을 헤매고 있고 나는 알랭의 문장들을 절대로 정확하게 기억해내지 못한다. 나는 29일 오전에 알랭의 『말의 예지』를 정확히 다섯 번째 읽었다. 9월 2일을 위해서. 내가 떠올린 말들은 말의 예지의 문장들은 아니다. 나는 말의 예지를 외우지 못한다. 말의 예지는 지난 5년에 걸쳐 나에게 다섯 차례 다른 인상을 남겼다. 다섯 번째 잘못된 인상. 다섯 번째 흐릿한 언어. 나는 군데군데 지워지고, 뭉개진 단어들, 문장들을 떠올린다. 나의 언어는 8월 30일 아침 9시 30분을 통과하지 못한다. 나는 동두천행 열차에 올라탄다. 열차가 몇 개의 역을 통과한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사람들이 내리고, 올라탄다. 열차는 달린다. 열차는 멈춘다. 나는 종로5가에서 내린다. 그 사이 전화가 한 통, 문자가 세 통 온다. 전화를 받고, 끊고. 문자를 읽고, 답하고. 나의 언어는. 말의 예지를 벗어난다. 이제 나의 언어는 29일 밤을 더듬고 있다. 인간 뭘까. 대체 인간 뭘까.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떠올린다. 종로5가역 3번 출구의 계단을 하나씩 오른다. 눈앞에서 발레리나가 완벽한 턴 동작을 반복한다. 인간 뭘까. 효제초등학교 앞에서 마을버스를 탄다. 올림픽국민생활관 앞에 내린다. 나의 언어는. 29일 밤,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건너고 있다. 왜 백조의 호수를 보다가 그런 문장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인간 뭘까. 인간 뭘까. 나는 습관적으로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떠올린다. 올림픽국민생활관 앞에 내렸을 때 전화가 온다. 전화를 받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하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건물의 계단을 오른다. 나의 언어는. 29일 밤에서 빠져나온다. 이제 막 30일에 도착한다. 안녕하세요.

탐구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창문을 열고, 침묵한다. 한 사람의 침묵.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다. 둘은 침묵한다. 두 사람의 침묵.
세 사람이 각자의 자세로 앉아 있다. 셋은 침묵한다. 세 사람의 침묵.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넷은 침묵한다. 네 사람의 침묵.
다섯 사람이 각자의 창밖을 보고 있다. 다섯은 침묵한다. 다섯 사람의 침묵.
여섯 사람이 차 안에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노래가 끝난다. 여섯은 침묵한다. 여섯 사람의 침묵.
그렇게 침묵은 열도 둘도 열둘도 되겠지만.
한 사람의 침묵과 열 사람의 침묵은 어떻게 다른가.
세 사람의 침묵과 서른세 사람의 침묵은.
달리는 차 안의 침묵과 휴게소 화장실의 침묵은.
환한 대낮 잔디밭의 침묵과 해질녘 대청마루의 침묵은.
깊은 밤 별 아래 침묵과 새벽 어스름 산길의 침묵은.
돼지껍데기집의 침묵과 카페의 침묵은.
고속도로의 침묵과 폐교의 침묵은.
무대의 침묵과 객석의 침묵은.
국밥집의 침묵과 노래방의 침묵은.
귀신 옆의 침묵과 이불 속 침묵은.
해장국집의 침묵과 다리 위의 침묵은.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국보 탑 옆에 돌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탑 주위를 구르는 돌 중 어떤 돌은 수천 년 전 탑이 된 돌의 일부일 것이다.
돌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주머니 속에 탑이 선다.

_DSC8037

행(行)

슬픈 상태로 머물러요. 슬픈 상태를 깨려고 하지 않으면 돼. 그냥 슬픈 상태로 살아. 술자리였다. 나는 이 문장들의 옆자리였고, 그냥 슬픈 상태로 살아, 라고 옆자리에서 마지막 문장이 발설됐을 때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때 누군가 혼잣말을 하는 것이 들렸는데. 그래, 자발적인 것은 슬프지 않다,였다. 슬픔은 의지적인가 무의지적인가. 자발과 비자발, 자비와 무자비.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슬픈 상태로 살아. 그걸 억지로 어쩌려고 하지 않으면 돼. 문장은 술잔에 고였다. 술은 단숨에 삼켜야 제맛인데. 술이 삼켜지지 않는다. 술은 술이고. 문장은 문장이지만. 술술 문장. 문장 술술. 두 번의 밤. 우리는 각자의 문장을 읽었고, 서로의 문장을 들었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문장들은 모두 공기 중에 흩어졌다. 문장에도 영혼이 있다면. 밤하늘에 별만큼이나 많은 영혼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나 별이 많다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계속 하늘만 올려다보고 싶었다. 서로의 문장과 문장이 나의 문장과 누군가의 문장이 구분 없이 이어져 새로운 별자리가 만들어졌다. 새우깡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고.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누군가의 문장을 들이쉬고 내쉬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다녀온 곳은. 여전히 머물러 있는 곳. 나의 언어는. 아직도 8월 30일과 31일 사이 어디쯤을 더듬고 있다. 오늘은 9월 5일이다. 나는 어떤 책방의 1주년 파티를 하러 나갈 것이다. 곧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것이다. 버스는 도착할 것이다. 미지. 의. 언어는. 나의 언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