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는 ‘시극’과 ‘시’라는 것 : 이지아

로트레아몽은 말했다.

그것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일. 더 잔인하고 대담하게 현실을 넘어서는 일

We just don’t care. 그것은 시이다.

 

들어가기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연기하는 배우일지도 모른다. 새와 돌과 해변과 대화하기도 하며, 밤의 시간이 되거나 도시의 뒷골목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던 시대의 문학 전쟁은 시의 자리를 좁게 지정하였고, 시는 여러 색깔과 모양만을 보여주어야 하는 기이한 시대로 들어섰다. 시인은 무대 위에서 낯선 방식으로, 절멸하는 표정으로, 건조한 동작으로 시를 형상화하는 데에 모든 영혼을 바친다.

시는 현실을 재현하거나 실감을 주는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예술이 되어 왔다. 자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소임이거나 정치적 역할의 자리를 없앤 것은 오래전 일이다. 시인은 그저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정신 나간 채로 방황하며, 세계와 뜨겁게 뒤섞이며 저도 모르게 시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예술의 사회적 존재 양태가 비껴가는 일은 없어서, 모범적인 ‘시 같은’ 시들은 클래식이 되었고, ‘시다운’ 시들은 시의 울타리 바깥에서 자극과 파동의 전자기파를 발생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달리고 있는 지금, ‘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사유를 오래 했다. ‘시 같지’ 않으면서, ‘시 다운’ 시들의 좌초의 운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도전하고 실험할 것인가? 여기에서 나는 시극의 과거로 돌아가 본다. 과거를 미래의 물질로 만들기 위하여. 더 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하여. 비트시, 무용극, 음악극 들처럼 사소하면서도 알갱이가 단단한 시극의 입체적 예술성이, 오늘날 무조음 속으로 침잠하는 시에 모종의 변화를 주기를 기대한다. 시극은 시와 극이라는 두 개의 다른 장르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부터 몰아 충돌시켜서, 전혀 새로운 양상의 언어 세계가 두려움을 넘어서 튀어나오기를 꿈꾸고 있다.

111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인간은 세계의 혼란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려고 한다. 문학은 언어의 다양한 조작을 통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다양한 조작을 행할 때 그건 시의 놀이와 즐거움인데, 그렇게 해서 거기에 질서가 부여되면, 독자는 그곳에서 문학이 들려주는 이야기(서사)를 찾는다. 시극은 언어의 시적 특징과 서사의 극적 성질을 두 개의 핵심 원소로 취한다. ‘시극’ 장르에 대한 규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시학』에서 문학의 장르는 서정, 서사, 극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극은 희극과 비극으로 나뉜다. 이 비극은 그리스를 모태로 하는 서양의 장르 이론을 토대로 ‘시’를 붙여서 서정시, 서사시, 극시로 명명되곤 했다. ‘서정시’는 오늘날의 시와 산문시 등으로 발전했으며, ‘서사시’는 소설이나 산문으로 확장되었다. ‘극시’는 이야기가 있는 그리스 비극을 가리킨다. 극시는 점차 공연을 전제로 한 ‘시극’ 작품으로 발전했으며, 운문적인 대사와 더불어 ‘드라마트루기’를 추가한 갈등과 극적 요소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비애극이나 그리스 비극 작품들, 괴테의 『파우스트』, 엘리엇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운문으로 된 극시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시극의 양상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극’이란 엘리엇이 명명하고 추구한 장르, ‘Poetic Drama’를 말한다. 엘리엇은 서정/서사/극의 한 종류로서의 ‘극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장르로서의 ‘시극’을 만들려고 하였다.

영미권에서 ‘시극’은 엘리엇의 사후 급격히 퇴조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시극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후,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시극 창작의 시도도 꾸준히 이어졌다. 그래서 시극에 대한 한국 고유의 역사를 만들기까지 하였으니, 나는 그런 역사의 가치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시극은 1920년 김명순의 「朝露의 花夢」에서 시작했다. 그 후 박세영·박아지·전봉건·신동엽·홍윤숙·장호·최인훈·문정희·김정환·황지우 등 여러 시인과 소설가들이 시도하면서 발전시켰다. 역사나 인간의 삶을 변용한 시극, 인간의 내면과 사상을 시극으로 창조한 경우 외에도 일반적인 시극의 방식을 벗어난 즐거운 시극들이 있다. 전봉건의 ‘라디오 시극(「사냥꾼의 일기」)’과 박세영의 ‘동시극(「소병정」)’, 김정환의 ‘오페라 시극(「열려라, 미래의 나라」)’, 최인훈의 ‘철학적 시극(「한스와 그레텔」)’은 다양한 형식과 장르의 진화 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한국의 시극 작품들에 나타난 공통점이 있다면, ‘비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구한 시학의 ‘비극’을 대상으로 한 것처럼.

19세기 니체는 ‘비극’을 연구하기 위해 음악의 슬픔과 비애를 연구하고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나는 비극성을 분석했다. 1920년 시작된 한국의 시극에 나타난 비극성을 연구하기에 니체의 철학에 의지하는 것은 좋은 예이다. 그가 분석한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비극성’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비극적 사유의 탄생』에서의 언급들이 특히 참조할 만하다.

니체는 “이성에 대한 믿음이 실종된 허무주의 시대에 새로운 삶을 건립하기 위하여” 비극이 탄생하였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비극작품에 대해 사유했다. 니체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폭력과 차별, 고통 등의 사건들을 ‘삶의 부정’으로 보았다. 이런 인식은 세계를 ‘비극적으로 인식’하며, 이 인식을 통해 삶을 개척하고, 바꾸려는 의지를 ‘힘에의 의지’로 삼는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비극성을 품은 인물을 두고,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며, 근본 정신인 인간의 “고귀함”을 가진 사람으로 설정했다. “비극적 사유의 탄생”은 시대의 문제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긍정적인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의 분석은 한국 시극에 나타난 비극성과 같은 길을 간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시민들의 의지와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민족사적 상황 때문이다. 설화나 민속 양식을 통해 삶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했던 우리 민족은 무가, 판소리, 마당극, 탈춤, 국극 공연 등 다양한 극 형식을 통해 즐거움과 여유를 찾았다. 부정적 감정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활기로 바꾸는 일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일이었으며, 나는 이러한 태도의 문학적 실천이 깃들 최적의 장소가 시극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현대시는 단일한 목소리로 현대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에 지쳐 있다. 개인의 희망은 사회 변화보다 늘 뒤처져 있고, 사회의 절망과 문제를 인식하기보다는 개인의 슬픔, 막연함, 애완동물과의 소통, 닫힌 취미 생활의 고독, 단편적인 일상의 목소리와 소재를 통해 청유형 문장이나 수동적인 태도로 소모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의 전위는 그 한계에 도전하고 초월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시극이 가진 비극성을 통해 시의 형식과 내용이 능동적인 방식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22

시극이 시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한국 시극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시의 새로운 미래를 전망하고, 다양한 문학 세계를 파악하는데 핵심적인 내용이 된다. 시극은 운문적이거나 산문적인 대사, 지문, 구조, 음악, 미술, 무용, 연기 등 종합 예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시극이 가진 특징과 형식은 새로운 시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극은 그에 대한 열망만큼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시적인 대사와 상징, 이미지에만 집중하여 시극 본연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구성력이 부족한 경우, 극화되었을 때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시극 작품이 새로운 시의 형식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혹은 시가 새로운 시극의 형식으로 창작될 수 있을까.

우리는 전형성과 상투성에서 벗어나 현대를 읽고, 현대성에 주목해야 한다. 시의 언어에 정서적 핍진성을 넣어 감각적인 효과를 최대한도로 가동시켜야 한다. 극이 가진 사건, 시간, 장소의 단일화를 통해서, 그 감각적 효과에 최고속으로 진행되는 극적 서사를 부여해야 한다. 나는 이런 미적 과정의 압축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시와 시극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는 시대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 문화영역에서는 사진, 영화, 방송, 광고 등 복제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움직이고 있으며, 통상 예술에 있다고 전제되어 온 ‘아우라’가 사라지고 있다. 대량 생산의 시대에 과학 기술의 발전은 현대인들이 스스로 개인의 동영상, 블로그, SNS 활동을 통한 창작활동이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이 창작활동은 예술 고유의 숭고함을 잃고 하찮은 놀이로 전락하고 있다.

하지만 왜 현대인들이 이런 액션을 즐기는가? 그것은 취미와 장난의 수준에서나마, 창작 활동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누구에게나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획일화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오히려 창조적인 일상을 꿈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인들의 문화적 활동은 최대한도로 감각적 자극을 추구한다. 무언가 다른 걸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감각적 자극은 유머나 장난, 배설의 수준에서 빠르게 소멸되어 버린다. 시극은 오늘날의 자극적 문화와 유사하게 감각 효과를 최대한 추구하지만, 그것은 어떤 숭고한 정신의 세계로 끌고 가려는 특징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시극은 전위적인 실험을 추구하는 시 세계에 영향을 주고, 사람들의 창조적인 일상이 가치 없는 소재가 되어버리는 현대 문화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지아 |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 극작가로, 쿨투라 신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트 쿠튀르』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