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드보르 / 영화 ‘스펙타클의 사회’에 붙여진 찬사로 가득한 만큼이나 적대적인 모든 평가에 대한 논박 / 대사와 원문 자막 번역 : 신은실

영화 <스펙타클의 사회>에 붙여진 찬사로 가득한 만큼이나 적대적인 모든 평가에 대한 논박 Réfutation de tous les jugements, tant élogieux qu’hostiles, qui ont été jusqu’ici portés sur le film ‘La société du spectacle’ (1975, 22min)

기 드보르 Guy Deb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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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이 영화에서 특별히 상기한 평론은 1974년 4월 29일자 《누벨옵세르바퇴르》, 5월 2일자 《르코티디엥》, 5월 9일자 《르몽드》, 5월 11일자 《텔레라마》, 5월 13일자 《누벨옵세르바퇴르》, 5월 13일자 《샤를리 에브도》, 5월 20일자 《르푸엥》, 《시네마74》 6월호에 게재된 것들이다.

“궁핍한 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경제를 업신여기는 짓을 삼가야 할 시기들이 있다.”
-샤토브리앙

[음료 광고]
현재 계급사회에서 스펙타클의 조직은 모든 곳에서 괄목할 만한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는 논리의 왜곡과 매한가지인 생산물의 보편적인 왜곡이고, 또 하나는 행복을 이 사회에서 발견한다고 우기는 모든 이들이 사랑하는 체 하는 것에 거리를 지키게 하는 강제이다.
그들은, 지적인 것이든 다른 것이든 심오한 직접 지식과 철저한 실천, 고유한 취향에서 오는 수단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독일의 간이음식점, 고객들에게 모형 기차가 계산서와 새 맥주잔들을 나른다. 음료 성분이 화학물질이라도 배달이 자동이라 고객들은 즐겁게 마신다.]
거주 환경과 와인, 문화적 소비, 풍속 자유화 등에 대한 것이, 혁명이론이나 규탄 받은 세상에 의지하는 가공할 언어에 대한 것보다 자연히 눈에 더 잘 띌 때, 이는 명백하다.
스펙타클의 특정한 냄새와 같은 이 순진한 날조와 무능력한 방조는,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영화에 응수하는 여러 모로 이해가 안 되는 각양각색의 품평을 잊지 않았다.

[옛 정부 청사를 나온 프랑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이, 자신을 기다리던 여러 기자들을 지나쳐 차에 올라 직접 운전해 떠난다.]
이 경우, 몰이해는 여전히 한동안은 인정된다. 스펙타클은 음모이기 보다는 비참함이다. 당대의 언론에 글을 쓰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성을 우리에게 전혀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가진 것을 술술 풀어놓는다. 그들의 습관과 사상, 사소한 것들에 그들 자신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을 묶어 공격하는 영화에 대해 그들이 무얼 적절히 말할 수 있을까?

[장례식장 관 주변의 영국 군대]
그들이 행하는 반동의 박약함은 그들 세계의 쇠락을 동반한다.

[한 커플이 고속도로 식당에 들어간다. 골똘히 메뉴를 보던 그들은 공장에서 만든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다.]
이 영화가 좋다고 말하는 이들은 이 영화를 좋아하기에는 다른 것들을 너무 좋아하고,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들도 그들 판단에 무게를 싣기에는 다른 것들을 너무 많이 받아들였다.
자기 삶의 빈한함을 직시하는 이는 자기 말의 빈약함도 잘 안다.

[광고 영화 : 여러 대의 자동차가 충돌해 도로를 막고 있다. 쾌속으로 달리던 특정 상표 타이어를 쓰는 차 한 대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지그재그로 사고 현장을 통과해 유유히 지나간다.] 그들의 환경, 직업, 상품, 의례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는 어디에서나 드러난다. 소외 속에서 당신들이 어찌되었는지를 당신들에게 말하는 이 멍청한 목소리들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며, 경멸을 담아 당신들에게 기별하는 그 목소리는 매 시간 첨언한다.

[광고 영화 : 여러 여성들이 스트립을 한다. 무슨 상품 광고인지는 아리송하다. 이 광고에 흐르는 소리는 평온하게 얘기하는 라디오 화자의 목소리다. 그는 가장 평범한 세상일인 양 교통체증과 휴가철 고속도로 차량 행렬 등을 얘기한다.]
관객들은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찾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것을 욕망한다.
[광고 영화 : 한 고객이 고급 영국 상점에 들어간다.]

[점원들은 그를 친절히 맞는다. 시연할 담배를 받은 고객은 담배가 너무 길다고 여긴다. 점원들이 담배를 잘라준다. 아직도 담배는 길다. 점원들이 더 잘라준다. 고객에게 거울을 비춰준다. 입에 담배를 문 고객이 거울 속 자신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는 만족스러워 한다.]
이를 좋아하게 될 정도로 스펙타클이 사람들을 비루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런 체하고 대가를 받는다.

[점원은 고객의 손에, 길이가 그에 맞춤한 보통 담배 한 보루를 쥐어준다.]

[4월의 포르투갈, 카네이션을 총에 꽂은 병사들이 군 트럭을 지나 걸어간다. 수병들이 시민들과 어울린다.]
지금 이 사회에 확실히 만족한다고 확언하는 데에 그들은 이르지 못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에 부랴부랴 불만을 표할 뿐이다.

[칸 영화제 시상식, 주연상, 각본상 등이 주어진다.]
불만을 지닌 이들은 모두 자신이 더 나아질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한데 그들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확인해주리라 믿는 것일까? 여전히 그들이 그런 비판을 무시하거나, 그 비판이 갑자기 그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때라고 믿는 것일까? 허가된 토지에 잘못 들어온 세입자인 그들은, 어디에서 말하는 지를 잊게 한 채 자신들이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더 자유롭고 진실한 미래에는 놀랄 만한 주제가 될 것이, 스펙타클적 거짓말 체제의 글쓰기에 고용된 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고 스펙타클을 부정하는 한 영화에 찬반을 표명할 수 있는 자격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치 이 체제의 해체가 그 의견들에 달려있는 듯 말이다. 그들의 체제는 지금 현실에서 공격받고 있고, 체제는 완력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그들의 무기인 위조 화폐는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하고 있기에, 실업은 지금 위조를 지휘한 고위층을 꽤나 위협하고 있다.
[이 멋진 날의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뮌헨 올림픽 장면들이 동시에 보이는 텔레비전 모니터 집합의 파노라마]
파산 중인 이 거짓말쟁이들 중에서도 가장 집요한 자들은 스펙타클의 사회가 정녕 존재하는지, 어쩌면 내 발명품이 아닌지 여전히 묻는 척 한다.

[포르투갈 노동자들의 행진, 그들을 진압하려는 병사들과 탱크 바리케이드가 기다린다.]
[자막 : “1975년 2월 7일 리스본에서 38개 공장 연합이 스탈린주의자들, 노조, 내각을 규탄했다.”]
그러나 여러 해 전부터, 역사의 숲은 무용한 패(牌)인 그들의 성을 향하여 걸었고(역주 :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버넘 숲이 맥베스의 성을 향해 움직이면 맥베스가 실각한다는 마녀들의 예언을 맥더프 부대가 숲으로 가장하여 실현하는 마지막 장면을 빗댄 표현) 지금 이 순간에도 공략을 계속 강화하고 있는데, 작금의 해설자들은 대개 그들이 내 책을 읽을 수나 있었던 듯이, 1967년에도 내 책을 마찬가지로 존중했던 듯이 비열하게 내 책의 우수함에 경의를 표한다.

[텔레비전 화면의 병렬이 이어짐, 바스트숏, 클로즈업의 롱테이크. 오로지 인간의 나약함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보지 못하게 한다. 혹은 적어도 이 게임에서 모든 걸 보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책을 스크린에 옮기며 내가 그들의 관용을 남용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그들에게 혹독했던 일격은, 그러한 과잉이 가능한지 그들은 상상도 못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책보다도 영화에서의 이러한 비평의 출현이 그들을 더 불안하게 했음을 증명한다. 이 지점에서도 여전히, 그들은 전투의 중압감에 눌려 퇴각하고 후방에 머문다. 많은 이들은 그 영화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불평한다. 몇몇 사람들은, 영상이 말을 듣는 걸 방해하거나 그 반대라고도 한다. 이 영화가 그들을 피곤하게 한다며 그들의 피로를 의사소통의 일반 단계로 자랑스레 승격하고, 같은 이론이 책에 실리면 어려움 없이 이해한다는 인상을 우선 그들은 주려 한다. 이에 더하여, 사실은 현실 사회에서 개전(開戰)한 사회 개념 투쟁을 영화의 개념에 관한 단순한 대립인 양 위장하려 한다.

왜 그들은, 정신적 피로가 완벽한 조건이 된 사회에서 굴러온 모든 잔여물들을 그들을 당황케 하는 영화보다 잘 이해하는가? 그들의 일과 여가, 지스카르 대통령의 사상과 전분 첨가물의 맛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모든 조잡한 궤변과 광고 또는 정부가 동시에 보내는 수많은 전언이 끊임없이 피워대는 안개 속에서, 그들의 약함은 어떻게 분별을 위한 최적의 자세를 취할 수 있는가? 어려움은 내 영화에 있지 않고 굽실거리는 그들의 머릿속에 있다.
어떤 영화도 그의 당대보다 어렵지 않다. 예컨대 낡은 권력 제조법을 따라, 새 장관을 “삶의 조건 장관”이라 칭하면 어떤 프랑스인들은 이해하고 어떤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마키아벨리가 말했듯, 그저 그들이 잃은 것의 이름이라도 보존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혁명 초기에, 스탈린주의자 쿠냘, 사회주의자 소아레스, 스피놀라 장군과 다른 이들이 권력을 분할하고, 휘황한 정부 청사의 공중 앞에서 한 사람씩 서명하여 혁명이 더 멀리 나아가지 못하도록 공작한다.]
포르투갈의 계급투쟁이 주로 자율적으로 조직된 혁명적 노동자들과 패주하는 장군들이 먹여 살린 스탈린 관료주의가 직접 충돌한 것이었음을, 이해하는 이들이 있고 이해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을 이해하는 이들은 내 영화도 이해할 것이며, 나는 이를 이해하지 못 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산유하는 유정의 연속 장면]
모든 논평이 시각 산업으로 오염된 같은 분야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논평들을 얼핏 봐선 작금의 상품처럼 다양해 보인다. 여러 사람들이 이 영화에 열광했음을 인정하면서 그 이유를 밝히려는 헛된 시도를 했다.

[현대 낙농업의 짧은 장면 : 화학과 자동화가 협력하여 현대의 소비를 만족시킬 만큼 짐승의 우유와 고기의 품질 수준을 끌어올린다.]
내 적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칭찬을 매번 들으며, 나는 그들의 추론이 어떤 논리적 오류를 범했는지 자문한다. 보통 그 이유를 발견하기는 쉽다. 낯선 다수와 이해할 수 없는 오만을 만날 때, 이곳의 아방가르드 소비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개인적 서정성을 지닌 멋진 낯섦을 재구성하면서 불가능한 동의에 접근하려 한다.
[심해로 이동하며 석유를 끌어올리는 장치 주변을 맴도는 긴 이동 화면]

[은하계]
어떤 이는 내 영화에서 “분노의 서정성”을 상찬하려 했고, 다른 이는 역사적 시기의 이행이 지닌 모종의 멜랑콜리를 발견했으며, 또 어떤 이는 나를 댄디로 간주하며 현실 사회의 삶을 정련했다고 확실히 과대평가했다. 이 모든 것에서 이 낡은 시대의 비루함은 “사실을 부정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해명하는 기벽”을 추구한다. 사회의 붕괴와 동행하는 비판이론은 자신을 분노에 내던지지 않고 단순한 이미지로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다.

[포르투갈 노동자들의 시위 : “과도정부 퇴진하라!”]
그것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이해하고, 묘사하고, 촉진시킨다. 어떤 이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유사 분노는 유행하는 예술 소재 같으며, 그들은 실제 삶에서의 영합과 타협, 모욕을 그렇게 보상 받으려 할 뿐이다. 관객들이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나쁠 건 없다.

[스탈린주의자 쿠냘(역주 : 살라자르 독재에 저항하다 투옥된 뒤 탈출, 망명 생활 중 1961년 포르투갈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으며, 1974년 군부의 ‘카네이션 혁명’으로 살라자르 체제가 무너지자 귀국하여 과도정부 내각을 지냈다.)이 동조자들과 연단에 등장하여 기만적인 구호를 굳건하게 외친다.]
정치적으로 반동인 자들이 내 영화에 표하는 반감은 당연히 갈수록 커진다.

[온건 민주주의자 역할을 맡은 소아레스(역주 : 살라자르 체제 반대 운동을 하다 1970년 파리로 망명, 1974년 귀국하여 과도정부 외무부 장관 자격으로 해외식민지 독립 교섭을 진행했다. 포르투갈 사회당수, 총리를 지냈고(1976-78), 1986년 60년 만에 민선 대통령이 된다.)가 모두에게 웃음을 보내며 꽃을 받고 지루한 회합을 주재한다.]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이론을 직접 촬영하여 정치 영화를 만들겠다”는 내 대담함을 그래서 어느 애송이 관료는 인정하고 싶어한다. 단지 그는 내 이론을 전혀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내가 “타협하지 않는 좌파”란 외연으로부터 점점 오른쪽으로 기울 것임을 그는 간파한다. “단결한 좌파 인사들”을 내가 체계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그 바보가 입에 잔뜩 담은 과장된 말들이다. 어떤 단결? 무슨 좌파? 어느 인사들?

이것은 스탈린주의자들과 프롤레타리아의 다른 적들의 공공연한 연합일 뿐이다. 각자 상대가 졸렬하게 서로를 속이는 걸 잘 알고 있고 매주 그 혐의를 크게 외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혁명적 노동자들의 모든 주도권에 대항하여 함께 사기 치려 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세부 사항의 보전에 이르지 못했어도 자본주의의 본질에 합의한 듯 군다. 얼마 전 부다페스트에서처럼, 포르투갈에서도 그들이 노동자들의 “반혁명에 대항한 파업”을 진압한다. 같은 자들이 이탈리아에서도 “역사적인 타협”을 하길 열망한다(역주 : 1970년대 이탈리아 공산당과 다른 정당들의 연정을 가리킴.). 같은 자들이 1936년 파업과 스페인 혁명을 분쇄하고 자신들을 인민전선 정부라 불렀다.

[1936년 7월 12일 뉴스 필름. 집회에서 적기를 흔드는 군중들. 연단에서 살랑그로는 좌파 회합을 말한다. 왜소하고 우스꽝스럽고 가증스런 이 남자는 무솔리니처럼 되기 위해 온갖 짓을 서슴지 않으며 선언한다.]
[자막 : “사회주의자 로제 살랑그로, 인민전선 내무부 장관”]
“우리는 질서를 세울 것입니다. 노동자 계급에게 자신의 의무와 이익에 따라 우리가 구속의 수단에 호소하는 것을 피하게 하고, 우리의 부름을 받을 것을 명합니다. 아닙니다, 인민전선은 무정부주의가 아닙니다. 인민전선은 질서를 보장할 수 있는 상태에서만 생존하고 승리합니다. 노동자 계급은 중간 계급, 농민 계급에 반하지 않고 요구되는 자신의 의무와 이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레 있을 대행진에서 삼색 국기와 노동 적기는 연합할 것입니다. 이번 7월 14일 혁명기념일, 프롤레타리아의 축제에서 우리는 파리 인민들에게 4월과 5월의 승리를 수호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인민들에게 정부를 향한 신뢰를 유지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정부는 인민에 의해서만 살 수 있고, 인민을 위해서만 살 수 있으며, 프랑스 인민이 도울 때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
[자막 : 이로부터 넉 달 뒤, 그를 고깝게 여긴 어느 극우 언론의 중상으로 자살하는 이 남자는 유권자들을 우롱할 힘 밖에 없었다.]

[걱정하는 듯한 스탈린주의자 쿠냘]
좌파 연합은 스펙타클적 사회의 수세적인 기만에 불과하며, 체제는 우연히 작동할 뿐이기 때문에 임시변통에 다름 아니다. 나는 좌파연합을 잠깐 내 영화에서 상기했을 뿐이다.
[밤에 넓은 계단 꼭대기에서 정부 청사를 경비하는 포르투갈 병사 대열]
물론 나는, 받아 마땅한 경멸을 담아 그들을 공격했다. 포르투갈에서는 우리가 더 넓고 비옥한 영토에서 그들을 공격했듯이.

[언론사 텔렉스, 라디오 방송국 기술 시설, 스튜디오 등]
역시 좌파에 가까운 어느 기자는 위조 문서를 출간한 것을 정당화하며 일종의 명성을 얻는데 이르렀다. 그는 이것도 언론의 자유라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베이징의 관료들을 다른 지배계급들을 공격했듯 확실히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암시하는 그는, 서툰 위조범이다. 한편 그는 내 사고 능력이 대중들이 볼 기회가 거의 없는 “게토의 영화”에 만족하는 것 또한 안타깝게 여긴다.
[리스본 섬유 노동자들의 시위]
그런 설득에 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대중에게 최면을 거는 이들이 조작하는 인공조명 속에서 그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대중들과 그늘에 머무는 편이 좋다.
반대로 위장에 서툰 다른 위선자는, 공공연히 스펙타클을 고발하는 건 이미 스펙타클 안에 진입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어느 신문의 이런 대단한 순수주의가 원하는 바가 뭔지 빤히 보인다. 스펙타클 속에서 아무도 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대학 식당”에서 식판에 음식 담기]
스펙타클적 사회에서도 하위 주체 자리를 잃지 않고, 젊고 빛나는 그 일원이 되고자 하는 야심 찬 희망만 잃은 이들은 어느 날 가장 솔직하고 격렬하게 자신들의 불만족과 질투를 드러낸다.

[광고 영화 : 사막 같은 풍경 속, 히피처럼 차려 입은 남녀들이 앞서 걷는 수염 난 남자를 즐거이 따른다. 물을 만난 남자는 그의 ‘Buggy d’Eram’ 상표 신발 덕에 물 위를 걷는다. 다른 이들도 그 신발을 신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재현한다. 하지만 신심이 부족하여 ‘Buggy d’Eram’을 믿지 않는 다른 이들은 무릎까지 물에 잠겨 뒤처진다.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익명 작가가, 그들에게 걸맞은 자리인 미테랑 대통령 후보 홍보용 코미디 주간지(역주 : 《누벨옵세르바퇴르》를 가리킴)에 순응주의에 가장 가까운 학설을 길게 늘어놓았다.

[지스카르 데스탱이 포르투갈 대통령을 맞이하는 순간, 자크 시라크가 그 뒤를 따른다. 의장대가 받들어 총 한다.]
익명의 작가는, 내 책을 1967년에 촬영한 건 잘한 일이지만 1973년은 너무 늦었다고 여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게 절박하다며 그는 이런 논거를 댄다 – 마르크스, 헤겔, 해방의 적절한 도구가 될 수 없는 일반적인 책들, 영화를 이용하는 것,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여전히 이론은 나머지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 자체-. 그는 그 속에서 무명으로 출현하는 걸 기꺼워한다.

[대학식당에서, 새로운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학생들이 줄 서 있다.]
이렇듯 조각난 사유는 당연히 황량한 뱅센 대학(역주 : 68 이후 파리 교외에 설립되어, 현 파리 8대학으로 발전했다. 방임과 개방을 정책으로 내세운 학사 행정과, 들뢰즈, 리요타르 등의 교수진이 유명했다.) 벽에서만 새어 나온다. 뱅센 학생들의 논문에서 이론이 생성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임시로라도 추천한 듯 보이는 것은 반(反)이론이다.

[졸업장을 받은 신(新) 사유인들이 계단식 대형 강의실을 가득 채움]
새로운 대학의 조교 자리 말고 그들이 팔 수 있는 게 있는가?

[경주에서 전력질주하는 사이클 선수들]
그에 만족하지 못하는 고물상 지원자 중에 가장 결핍된 이들은, 적어도 어느 출판사 기획서의 책임 편집자나 가능하다면 연출자가 되려고 지금 여기저기서 종을 울린다.

[꽃다발과 메달을 받는 우승자]
아까 언급한 익명의 필자는 나를 향한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영화는 화려하다.

[산업 지역의 다리를 공중 이동 촬영]
어떤 반이론도 그의 유일하고 고유한 성취인 침묵에 쉽게 이를 수는 없는데, 그것을 내세우는 이들이 별 차이 없는 월급쟁이 이상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지 광고 영화 : 뮤직홀의 환호하는 여성 관객 앞에서 남성들이 음악에 맞춰 바지를 입는다.]
익명의 필자는 마지막에 유희를 그만 둔다. 그 협잡꾼은 단지 다른 역사를 선택하여 역사를 와해시키려 했다. 그는 미래의 사상가들을 지명하고 싶어 했다. 이 돌대가리는 냉정하게 리오타르와 카스토리아디스(역주 : 헝가리 혁명을 소련이 무력으로 진압한 직후인 1956년 11월, 이 두 사람은 조르주 바타이유, 앙드레 브르통, 에드가 모랭, 모리스 나도 등과 함께 국제 좌파 지식인 모임인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 그룹을 결성한다. 드보르가 1960-61년에 참여하는 등 상황주의자들도 60년대 초반까지는 이 그룹에 지극히 호의적이었다. 1963년 그룹 해체 후 리오타르와 카스토리아스 등은 저술가, 학자로 점차 명성을 쌓아갔고, 드보르가 이 영화를 발표한 1975년 즈음엔 상황주의자들과의 연대도 지리멸렬해졌다.)를 앞세우고, 나머지는 뒤처진 찌꺼기로 취급했다. 말하자면 15년도 더 전에 자신의 불을 지폈던 이들이 자기 당대를 제대로 사로잡지 못한 것이다.

[아이스 티 광고 영화 : 미국 남북전쟁, 저택과 파티를 남기고 남군 병사들이 전쟁터로 떠난다. 이 시절을 모르는 이는 삶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둥 하다가 갑작스런 헤겔적 결론 : “그들의 문명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아이스 티.”]
역사를 사랑하는 패배자는 없다. 더욱이 공통의 역사를 부인하면서, 가장 과감하고 선구적인 출세지상주의가 왜 재통합된 오십대들과 연관되는 것을 굳이 꺼리겠는가? 1968년 이후 큰 변화를 겪으면서 익명으로 남아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이가 여전히 교수를 경멸하지 못함을 고백하는 걸 무엇 때문에 역설적으로 보겠는가?

[포르투갈, 군인들이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이 익명의 필자는 그래도 다른 이들보단 나아서, 무능한 자들이 현실을 반박하는 거짓 경멸의 사실적 의도처럼, 자신이 내세운 반역사적 성찰의 무능함을 내보일 줄 알았다. 출간 6년 뒤 『스펙타클의 사회』의 영화화에 착수한 것은 너무 늦었다고 상정하며, 지난 백 년간 이처럼 확고하게 중요한 사회비평서가 세 권도 없었다는 점을 그는 우선 무시한다.

[북군 약탈자가 남부 저택에 들어와 약탈하고 불을 지른다.]
한편 그는 책을 쓴 이가 바로 나였다는 걸 잊고 싶어 한다. 내가 느렸는지 빨랐는지 평가하기 위한 모든 비교 기준이 빠뜨린 게 있는데, 내 선배들 중 빼어난 이들이 영화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위업을 처음 실현한 것이 기쁘다고 나는 고백한다.

[포르투갈에서 한 연설자가 탱크 위에 올라 군중들을 진정시킨다.]
스펙타클의 옹호자들은 이러한 영화의 새로운 쓰임을 깨달을 것이며, 혁명적 항거의 새 시대가 그들의 사회를 침식할 것임을 서서히 알게 될 것이다.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는데, 시위대 맨 앞줄에 있는 소녀는 누구보다 확신에 차있다.]

[영국 왕의 장례식에서, 총을 거꾸로 멘 군대가 도열한다. 고지(高地) 연대, 해군, 근위 보병 연대, 근위 기병대가 제국의 영광을 보여주는 옛 의상을 입고 지구의(地球儀)와 권장(權杖)으로 치장한 관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깨달음을 역시 거북해할 것이다. 그들은 같은 길로 전진하면서, 우선 입을 다물고, 이윽고 주제를 벗어난 말을 한다. 내 영화를 비평하는 이들은 이 단계에 있다.

영화전문가들은 그 영화에 잘못된 혁명적 정치가 있다고 했고, 환각을 좇는 모든 좌파 정치인들은 나쁜 영화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혁명가인 동시에 영화예술인일 때, 그는 다음의 명증함에서 기인하는 자신의 총체적 신랄함을 쉽사리 증명한다. 의문에 부쳐진 그 영화는 그들이 맞서 싸울 줄 모르는 사회에 대한 적확한 비평이며, 그들이 만들 줄 모르는 영화의 첫 번째 예다.

번역 : 신은실(영화평론가)